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석 Apr 02. 2020

정말로 저출산이 해결되길 바라십니까?

뚝딱 해결하다가 머리가 뚝딱해질 수 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출산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는 비혼, 딩크족들은 적어도 저출산에 대해 책임은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정녕 이기주의자이기에 고령 사회든 뭐든 저출산을 해결할 마음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이 사회를 만든 주범이 아닌 사회에 대한 나름의 적응을 한 것뿐이며 사회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선 안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질문은 남아 있다. 비혼과 비출산을 말한다면, 저출산 문제 해결은 이미 포기하고 사회 고령화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대답을 하기 위해 우선 판을 깔아보겠다. 예전부터 인터넷에서 돌던 문답이 있었다. 질문자가 당신은 오토바이가 때때로 과속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안된다고 말했다. 질문자는 질문을 살짝 틀었다. 그럼, 배달부가 신호를 준수하고 정속을 지키느라 당신의 치킨이 식어도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했다. 두 질문은 결국 같은 것이다. 연이어서 같은 질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답을 바꾼 것이다. 왜 그런 걸까? 한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자. 처음 두 질문을 한 후, 새 질문을 했다고 처 보자. 치킨 배달부가 요청에 쫓겨 속도를 올리다 사고로 사망하게 돼도 괜찮으십니까?라고.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위 세 가지 질문에 답이 다른 이유는 바로 질문이 상황을 다르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질문은 단순한 규칙에 집중했다. 두 번째 질문은 개인의 욕망을 조명했으며, 세 번째 질문은 감성을 자극했다. 이 일종의 가상 실험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질문자의 어휘가 얼마나 중요한지와 어떤 명확한 답이 있더라도 개인의 욕구가 판단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경우를 탐진치라고 한다. 탐진치는 마음에 있는 세 가지 독으로 고통의 원인이다. 탐은 탐욕, 진은 진노, 치는 바보 천치, 즉 어리석음이다. 불교에서 세계는 법에 따른 인연 과보가 있다. 이 인연 과보를 바르게 바라보면 세상에 고통이란 것은 없다. 내가 치킨을 빨리 먹고 싶지만 배달은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고, 어느 정도는 기다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기다림은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치킨이 빨리 배달되길 원하는 탐욕을 부리고, 치킨이 식으면 진노한다. 결국 탐진치는 고스란히 업보로 돌아와 배달부가 과속하게 만들고, 교통사고라는 과보로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 욕구는 사실상 교통사고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비유이기에 논리 가으로 허술하긴 하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바랄 때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저 욕심만 부린다면 필히 그 과보를 얻게 된다는 것은 바로 전해졌으리라 여기겠다.



위의 치킨 문답과 비슷하게, 이제 저출산 문답을 해보겠다. 우리는 저출산이 해결되길 바란다. 맞나? 다시 질문해보자. 개인과 개인이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점점 힘들어진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일인가? 요로 보나 저로 보나 문제가 맞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때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그럼 연이어 이러한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 왜 아이를 낳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답 역시 정해져 있다.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육아 휴직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자. 노동부에 의하면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는 업체는 34% 정도 된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나 아직 절반이 넘는 업체에서는 개인의 출산을 막고 있고, 직간접적으로 출산율을 낮추고 있다. 개인의 소득과 부동산 같은 문제도 같이 엮여 볼 수 있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한 명의 아이를 키우는데 드는 비용이 약 4억 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의 경우 집 한 채 사는 것부터가 일단 어렵다. 그 내들에게 빚을 네 서라도 하우스푸어가 되라는 말을 할 수도 없다. 당장 표면에 보이는 지표가 이러한데 원활한 출산을 바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왜 저출산을 저해하는 이러한 사회 풍조를 바꾸지 않을까? 질문이 여기까지 오면 대답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당장 직장 동료가 한창 바쁠 시기에 1년간 임신 휴가를 가야 한다고 선언한 후 훌쩍 떠나버린다면, 그 회사 직원들은 그것을 온전히 축하해 줄 수 있는지 쌓여있는 보고서 파일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집을 샀는데 갑자기 옆 단지가 임대주택단지로 바뀌어 그 집 값이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임대단지 사람들을 미워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통장 잔고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곳 국민의 삼 할이 고령이 된다는 뉴스를 봤지만 너무나도 어리석기 때문에 육아 휴직을 간 남자 후배가 아니꼽고 내 집값은 계속 올라갔으면 좋겠다. 간이 굳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들처럼 우리 사회는 저출산 문제에 혀를 끌끌 차면서 정작 근본적인 문제 해결엔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하다.



우리는 탐욕스러우며 쉽게 불평을 말한다. 이러한 삼독의 해결법은 이를 제거하고 회피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어째서 어떤 이들의 욕구가 출산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는지 말이다. 결국엔 돈의 문제이고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막말로 온 사회가 결혼과 출산은 당장에 경제적이지 못하니까, 쓸모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다. 여전히 남자와 여자 간 차별을 두고, 휴가 쓰는 것에 눈치를 주며 개인적인 시간이 느는 것을 아니꼽게 바라본다. 빚을 쥐고 일하는 이들을 휘두르며 이들에 대한 지원은 언제나 심사숙고하여 최소한만을 준다. 결혼을 하고 말하지만 동시에 결혼은 가슴이 아니라 돈이 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출산은 걱정되고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예수가 말하길 죄 있는 자만이 돌로 치라고 하였듯 이런 상황에선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피상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질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해보겠다. 자신이나 자신의 지인이, 육아 휴직을 쓰기도 힘들고 모아둔 돈도 마땅치 않으며 살고 있는 주거 환경조차 부적절한데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어떨까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답이 나오기까지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칠 것은 분명하다. 질문 자체에 누군가의 희생과 타협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욕망에 속하고, 저출산이란 현실에 계탄하는 것은 분노이다. 그리고 단순히 아이를 낳으면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바보 천치, 어리석음에 속한다. 출산은 치킨을 배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음식 하나 일찍 먹겠다는 업보가 교통사고라는 과보로 돌아오는데, 그저 저출산이 걱정되니 아이를 낳으라 말한다면 그 업보는 어떤 과보로서 되돌아올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과보가 아직 터져 나오지 않았는지, 저출산을 그저 해결되길 바라는 안일한 백치들이 실질적으로 죄 없는 개인들을 저출산에 협조하지 않는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현 젊은 개인들은 기꺼이 사회적 죄인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상태이다.



저출산 해결이란 말이 너무 쉽게 쓰이고 있다. 여러 가지 징검다리를 거치지 않고 그저 뚝딱 해결되길 바라는 무책임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질문을 던지겠다. 저출산이 해결되길 바라는가? 나는 아니다. 이런 사회 상태에서 출산율이 올라봤자 또 다른 문제만 생겨날 뿐이다. 뛰기 위해선 우선 걸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먼저 출산율이 올라도 될 사회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옷 뭐 입을까 고민하는 나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