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로 죽지 않는 민간요법 1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생각
내가 초등학교 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좋은 일은 없지만 나쁜 일도 없었을거야냐."
그때 나는 자살이 대화 주제로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멈춘 적이 없다. 삶이니 무엇이니 신경 끄고 널성널성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독 삶과 의미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면에선 아주 열정적이었지만 쉽게 지치고 우울해한다. 이는 어느 정도 선천적인 듯한데.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죽지 않기 위해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그 옆에 있다는 것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 역시 죽음을 생각해왔다.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자살이 병적인 우울감과 관련이 있고 우울감은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조망해봤을 때 우리들은 죽음에 대한 치료엔 열성적이나 삶에 대한 정착엔 냉담하다. 삶이란 어쩔 수 없이 고되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다들 자살을 잊어버리고 사는 모양이다. 이들은 이따금 '죽을 각오로' 살아가는데, 이미 몇 번 시도해본 이들에게 이런 말은 우스울 따름이다. 죽기보다 어려운 일을 하기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런데 살아가느라 바쁜 사람들은 죽는 것보다 나쁜 삶을 영위하느라 바쁘다. 그렇게나 삶을 미워하니, 스스로 죽기 전에 삶이 먼저 떠나갈까 걱정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차라리 죽음에 취약한 이들이 삶에 익숙한 사람보다 건강하다. 죽음에 취약한 이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그래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좋기 때문인데,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삶이 좋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이란 선택지를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에게 죽음이 엄습해 온다면 그때도 그저 치료로써만 연명하려 할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나는 죽지 않기 위한 민간요법이 없거나 부실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시다시피 모든 병은 그저 아픔-괜찮음이라는 두 척도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당장 감기만 생각해봐도 그저 걸렸다-아니다라고만 판단하지 않는다. 어떠한 징조가 보이면 우선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충분히 휴식하며 무른 음식을 먹는 등 몸을 보신하려 한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도 스스로 몸이 좀 약하다 싶으면 찬 것을 피하고 가까운 곳에 늘 감기약을 상비해둔다. 그러다가 독한 감기에 걸렸다 싶으면 그때 병원에 가며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유독 죽음에 대해서만 정신병자와 정상인 이 두 가지로만 판단하려 한다. 때문에 비참하진 않지만 살짝 우울하고, 죽음이 아른거리는 사람은 자신의 통증이 증명되기까지 방치된다. 그러다가 결국엔 엉망진창이 된 후에야 발견되는데,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인정받는다. 즉 자살에 취약한 이들에겐 그저 마지막 저지선이 아닌 평상시 사용하기 위한 일명 '죽지 않기 위한' 일종의 강령이 필요하다.
우울한 사람에게 자살과 삶은 마치 버튼 하나 누르고 말고 정도로 쉬운 선택이다. 삶의 도덕률이나 가치, 이론은 죽음 앞에서 너무도 쉽게 사라진다. 차라리 죽지 않는 것이 부조리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부조리한 삶이 있듯 부조리한 죽음도 있다. 부조리하게 죽지 않기 위해선 숙지하고 있어야 할 대전재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살아있다 보면 상황은 바뀐다. 상당히 낙천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시간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는 적응이란 것도 하고 변심을 하기도 한다. 아예 바깥 상황이 우연찮게 바뀌기도 한다. 카메라가 카메라 자신을 찍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예상하기 어렵다. 그 고통이 영원할 듯하고, 지금 현재 죽음이 꽤 합리적인 답안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새로운 상황이 내 앞에 차려지면 금방 죽음을 잊기 마련이다.
둘째, 우리의 마음은 몸과 환경에 생각 이상으로 취약하다. 사람은 아주 작은 티눈 하나로도 쉽게 우울해지곤 한다. 어제보다 살짝 설탕을 덜 먹어도 기운이 없고, 어쩌다 몸을 많이 쓰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때론 이유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요인으로 심정이 들쭉날쭉해지게 된다. 곳 인간이란 눈에 씐 헛것에 바로 보지 못하고 덧없는 것에 일희일비한다. 이는 비극이지만, 어찌 보면 호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토록 음울하고 범세계적인 고뇌를 하더라도 아주 간단한 물질적 작용을 통해 삶을 살아갈 의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병을 치유하거나, 회사나 학교를 좀 쉬거나, 특정 사람을 만나지 않던가, 하며 부정적인 요인을 제거하면 금방 죽지 않을 수 있다. 기뻐지는 요인을 추가할 수도 있다. 뭘 사도 좋고, 몸을 움직이거나 햇볕을 쬐거나 해도 좋다. 맛있는 걸 먹어도 좋고, 친구를 만나도 좋다. 이도 저도 안되면 약을 먹으면 되니, 언제든지 행복해질 가능성은 열려있다.
여름엔 겨울의 애는 추위를 상상하기 힘들고 겨울엔 여름의 찌는 폭염이 있었는지조차 의심하곤 한다. 지금 우울하고 더 나아지리란 생각이 들지 않아도 이는 우울감에 빠져 있기 때문에 눈이 트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갈대보다 쉽게 움직인다. 이를 잘 이용해야 한다.
셋째, 충족되는 순간 쾌락은 사라진다. 죽고 싶다는 것만큼이나마 위험한 것은 무언가를 다 이루겠다는 생각이다. 완벽은 도달했다 여기는 순간 사라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어찌 완벽에 다다라 봤자 얻는 것은 회의감과 우울함이고, 쾌락에 대한 집착만이 반동으로 되돌아온다. 무언가를 달성했다는 만족감과 어떤 것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쾌감을 분리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계념 간 차이는 완전함에 대한 관점에서 나타난다. 달성감은 나 자신과 외부를 완전하게 느끼고 외부와 상호 호해적인 피드백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정복은 자신과 외부 모두 불완전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서로 파괴적인 간섭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정복의 관념으로 바라볼 때 종교, 국가, 가족, 애인, 친구, 사랑, 우정, 기쁨, 행복 모두 완전한 것은 없다. 단지 그걸 느끼는 당신의 몸만이 존재한다. 당신이 느끼는 외부가 곳 당신이고,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곳 외부이다. 그러니 당신 아닌 것이 없고 당신인 것 역시 없다. 그런데 완전하다는 그 범주에 집착하느라 있는 것을 부정하고 없는 것을 숭상하니 자살보다 더 악독하다.
대전재를 숙지하고 죽음을 바로 바라볼 준비가 됐다면, 일단 자신이 우울한지 아닌지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 사실 자신이 우울한지 의심하는 사람 중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신이 나약할까 봐 고통을 애써 무시하는 것인지, 차라리 완전히 추락해서 마음껏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 하여간 우울을 덮고 보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도저히 무엇이 우울한 건지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까지 왔다. 가시에 찔렸는데 이게 아픈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는 것이다. 신체에 경우 이런 것을 신경마비라 하여 아주 중하게 다루는데, 마음에선 이런 것을 잘 견뎌넨다고 칭찬한다. 이래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우울감 확인법이 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고, 일종의 민간요법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우선, 깨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보다 일단 자는 게 더 좋다면 한번 삶을 되짚어 보는 게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잠인데, 건강한 사람은 잠을 싫어하지 않지만 잠을 미뤄가며 할 것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잠보다 즐거운 것이 없다는 것은 삶이 온전히 불행하다는 뜻이다. 이 증상이 심해지면 현실에서 잠으로 도피하다가 결국 더 심한 잠, 죽음을 바라게 된다.
지금 내가 우울한 이유를 알고 있지만 주변에 말하기 불편하거나 꺼려질 경우 생각보다 위험한 상태이다. 이 때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상을 당했거나 실연을 겪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땐 누구에게 말해도 금방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다. 타인에게서 위로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는 부류의 고민들은 쉽게 문제 해결 절차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보통은 탈선, 범죄, 이상 성욕 등등 너무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경우 그 짐을 온전히 홀로 져야 하기에, 버티지 못할 지경에 다다르기 전 전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만약 그 이유가 너무 하찮고 가벼운 것이라 말하기 껄끄러운 경우 역시 좋지 않은 징후이다. 계단 오르는 게 힘겨워서 울화가 치밀고 억울하게 느껴지거나 반찬이 하나 맛이 없다고 머리가 지끈지끈해질 때. 평소엔 그러지 않았다가 요즈음 유독 그렇다면 작은 것에 힘겨울 만큼 정신이 취약해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니, 사태를 진지하게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