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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08. 2021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 소녀들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최현미/노신회>를 읽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소녀와 만나면서 살아왔는지 모른다. 여성, 여자, 여인, 처녀, 이 모든 표현보다도 소녀란 표현이 맞는 존재들은 책에서, TV에서 다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소녀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소녀 중엔 내가 만난 소녀도 있었고, 처음 알게 된 소녀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특별한 만남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 100% 맞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생각은 언제나 내게 생생한 활력의 계기가 되어주는 법이다.      


몇몇 소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면, 앨리스는 정말 흔하게 만난 소녀지만, 내겐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뒷배경을 오늘 알게 되었다. 교훈이 팽배한 시대에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이야기이자, 아이가 어른의 이상한 점을 집어내며 비판하는 이야기, 거기다 소녀가 모험하는 이야기라니! 여러 번 읽어 본 바 있어도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앨리스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은 섬찟하다. 정의감이나 도덕심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한 세상.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하는 세상,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주민이 된 우리를 마주한 기분은 참 잔인하다. 부정하고 싶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보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꾸물꾸물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누르고 마주한 앨리스는 순수하고 티 없이 깨끗하다. 그래서 더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동화 속 정의의 여신이 앨리스가 아닐까? 앨리스의 ‘이상하다’란 말 앞에 무너지지 않을 자 누구일까. 앨리스 역시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낸다. “난 어디든 별로 상관없어요. 어디든 도착만 한다면요….”“그렇다면 어느 길로 가든 괜찮아. 꾸준히 걷는다면 말이야.” 이 문답은 정말 간단하게 해답을 내어준다. 무엇이든 괜찮다면, 꾸준히 해봐라. 그렇다면 무엇이든 되어 있다. 헤매는 내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과장하자면 눈물이 날 정도로.     


앨리스와 달리 앤은 내가 가장 사랑한 소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앤을 ‘행복을 찾고 마주하는 아이’라고 본 적이 없었다. 되새겨 보면 늘 앤은 행복하단 표현을 썼고 그 표현에 나는 웃곤 했다. 나 역시 행복하단 말을 종종 쓰긴 하지만 앤만큼 쓰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앤의 영향은 다양하게 남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로 남고 싶은 것도 글쓰기 모임에서 활동하는 것도, 한때 교사의 꿈을 꾸거나, 글쓰기에 흥미가 생긴 것 모두 앤에게서 받은 선물이니까. 내가 무의식중이나 의식 중에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에 앤의 영향도 있었을까?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받았는지도 모른 채 누렸던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앨리스처럼 웬디 역시 내겐 깊은 인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분노했다. 웬디 콤플렉스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에 일순 안심했지만(그만큼 드물어졌단 이야기이므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남자는 모험하고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한 곳이 네버랜드라니! 여성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최근에 본 피터 팬의 재구성은 <판>이었는데, 네버랜드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음의 재구성은 모든 아이를 위한 네버랜드가 나오길 바란다.     


인어공주도 내게 깊게 들어온 소녀는 아니었지만, 신데렐라나 오로라보다는 좋았다. 다만 내가 좋아한 소녀는 디즈니의 소녀는 아니었다. 디즈니에서 표현한 인어공주 아리엘은 내겐 거짓된 모습으로 보였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결말이 다른 이유가 그녀의 태도에 있다는 이야기는 실로 충격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자발적으로’ 남성에게 다가간 첫 동화 속 여성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 것까지 말이다. 나는 예전에 인어공주의 언니 설정으로 만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나는 절대 내 자매나 가족이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린 것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어공주가 해피 엔딩인 것보다 새드 엔딩인 것이 자연스럽지만 인어공주가 그렇게 죽지 않기를 소망했는데. 인어공주의 사랑이 모험으로 끝나고 자신의 삶을 찾길 바랐는데. 저자의 말대로 인어공주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왕자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거절당했을지언정 인어공주는 그녀의 삶을 살았으리라. 본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연애의 명언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법칙은 똑같다!    

 

소나기의 소녀는 깊지도 얕지도 않았다. 여성인 내게 여자인 첫사랑이 있다면 그런 기분이겠구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투명하고 아릿한 사랑의 모습이랄까? ‘잔망스럽다’라는 표현을 잃을 수는 없겠지만. 요즘은 남자 여자 첫사랑을 가리지 않고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의 모습으로 이야기하지만, 예전엔 그렇게 봤다는 것이 아쉽다. 점순이도 그렇게 나오니 첫사랑에 눈을 뜬 여자애를 어떻게 봤는지 알 만하다. 잔망스럽다는 말이 나쁜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이다. 남자는 당연해도 여자는 의문스럽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리본의 기사는 정말 처음 만난 소녀지만, 더없이 익숙했다. 나 자체가 남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남장이라는 갑옷을 입고 실력을 뽐내는 소녀는 언제나 빛나서 한 번 그 모습을 보면 자연히 찾게 된다. 다만 늘 남장이 무색하게 결국 사랑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이상하다는 점은 공감한다.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제는 매체에서 남장이 이성에게 다가가는 하나의 수단 정도로 느껴질 지경이기 때문에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남장이라는 도구 겸 수단이 낡아 보인달까? 어찌 됐든 쓸모를 다했으니 굳이 더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남장을 선택한 비장함이 무색하게 왜 모든 갈등과 고민은 서둘러 봉합되는가. 사랑한다고 우리의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라는 저자의 발언은 정말 뿌리를 휘젓는 말이다.     

내 삶에 있는 소녀와 저자의 소녀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는 주변의 친구나 이런 소녀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런 소녀들의 기억을 되살려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하면 좋았을지 이야기해봤으면 좋겠다. 같은 소녀들을 보고 남은 흔적을 서로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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