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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ul 07. 2021

즐거움을 제대로 담은 화가

<치유의 미술관-유경희>를 읽고

즐거움을 표현한 작품이 몇 개나 있을까? 내가 비극을 선호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희극보다 비극을 훨씬 많이 접해왔다. 영화든, 그림이든, 책이든 말이다. 보면서 웃은 작품 하나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그저 즐거움, 기쁨, 행복에 대해 마음에 깊이 남았던 건 슬픈 것들이었다. 인어공주, 섬집아기, 로미오와 줄리엣, 도깨비…. 하다못해 왁자지껄한 게 대부분인 <빨간 머리 앤>에서도 매슈의 죽음이 가장 여운이 길었다. 이런 선호를 보면, 즐거움에 대한 작품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건 나만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남들보다 가슴 아픈 걸 즐기고, 그런 슬픔을 마음껏 누린달까. 그래서 더 눈물이 많을 수도 있지만 그 덕에 보테로에게 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페르난도 보테로, 발레리나>


페르난도 보테로란 이름은 사실 작품에 비해 덜 유명하다. 그의 화풍은 ‘뚱뚱한 사람’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화가의 화풍이 곧 지문이자 필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던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구분하기 힘들어도, 현대미술에선 구분이 쉬워진다. ‘다른 것’에 집중하고 개성을 중요시해 화풍이 다채롭게 등장한 덕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보테로는 유별나다! 얼핏 보면 정말 아이가 그린 것처럼 둥글둥글하고 살찐 사람들의 모습은 쉬이 생각해내지도, 그리지도 못할 법한데 참 신선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오랜 미술사 속에서 살찐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그런 틀을 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사실 나는 보테로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는 줄로만 알았다. 다이어트에 민감하고 몸매에 예민한 요즘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게, 외모에 과한 신경을 기울이는 걸 날카롭게 표현한 경우가 워낙 많았으니까. 외모 지상주의란 현대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뚱뚱하게, 살찐 모습으로 그렸구나 싶었다. 그 외에는 살찐 모습의 사람을 그리는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냥 조금 풍만하게 그린 것도 아니고 공처럼 둥글둥글할 정도로 그렸으니, 당연히 저건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술에서 굳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셈이다. 참… 틀에 박힌 사고를 한 전형적인 예시다.      


실상은 달랐다. 보테로는 자신이 살찐,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태 과장에만 의미를 두어 감각적 체험을 극대화하는 데 신경을 기울인 것이다. 형태의 풍부함과 충만함, 그러한 미적 조형성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놀라웠다. 현대 사회에서 살은 거의 죄악이 아니던가. 게으름과 나태, 자기 학대로까지 보이는 경우도 잦다. 그런 관념이 잘못된 건 알지만, 너무 만연해 있는지라 반쯤 받아들이고 살곤 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완전히 정면에서 깨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림을 보면서 불쾌하지 않았다. 유쾌하고, 어찌 보면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게 살이 가진 진정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태초의 비너스처럼, 품어주는 어느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충만한 자태가.     




다시 우리의 모습을 성찰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예전에 ‘지방이’라는 캐릭터가 유행한 적이 있다. 몸의 지방을 살덩이처럼 표현한 것인데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름에 걸맞게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 다들 좋아했었다. 우스운 것은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지방’이나 살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단 것이다. 그때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없단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우리 몸에 너그러워지고, 형태보다는 그 안의 건강을 중요시하게 된 변화가 없었단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이란 형태가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외면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보테로의 입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 의미를 알았을까? 그걸 편안함, 충만함, 풍부함,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그런 즐거움, 아름다움을 표현한 화가가 보테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의 인생이 너무나 비극적이었기에 그들의 작품이 즐거워도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즐거움보다는 슬픔의 승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테로는 그런 점에서 자유로워 즐거움을 더 순수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험을 처음 해본 탓으로 놀랐고, 새로웠고, 부끄러웠다. 보테로는 진정 우리 몸에서 즐거움을 찾아낸 화가가 아니었을까? 그 누가 이런 충격을 이렇게 유쾌하고 밝게 줄 수 있을까 싶다.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깊게 표현해, 짙은 여운을 남긴 이는 그만이 유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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