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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ul 05. 2021

대체 극사실주의는
왜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가

극사실주의의 등장에 대하여

미술을 공부하면서 든 의문이 있다. 어쩌면 단순하고 어리석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 의문은 참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 의문은 그다지 특이하거나 이상하지도 않다. 그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정의된다.


카메라가 있는데, 왜 극사실주의가 등장했는가? 그 화풍의 의미가 있는가? 등장의 이유가 있나? 


본디 추상주의나 팝아트처럼 화풍은 사회 분위기나 몇몇 천재들로 인해 나오는 법인데 뭘 의미까지 찾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문에 어떤 이들은 공감해 줄 것이다. 카메라 이상으로 극사실적인 게 있을 수 없는데, 대체 그런 화풍이 왜 나왔느냐는 질문에 말이다!     


사실 극사실주의의 등장은 그 역사적인 환경에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나오기 이전, 그림의 존재 의미는 아주 명확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 혹은 알리고자 하는 걸 보여줄 때 제일 적합했기 때문이다. 글을 몰라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은 사전 지식이 없어도 파악이 가능하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느 지역의 어느 풍경이 어떤지 볼 수 있고, 결혼할 사람이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도 볼 수 있지 않은가! 기계와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그림은 시공간을 초월해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즉, 그림은 기록의 역할을 지녔다. 그게 스스로의 자화상이든, 왕족의 초상이든, 종교를 위해서든, 아니면 대의를 위해서든 말이다. 괜히 옛 그림들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그 시절을 그렇게 눈에 보이게 설명하는 방법이 흔치 않다! 어떤 왕조든 화가가 늘 있었다는 점이 참 의미 있지 않은가. 글을 쓰고 익힌 학자들도, 관리들도 모두 그림의 존재 이유를 인정한 셈이다. 혼자 감상하고 누리는 것이 아닌 전파하고 교육하는 의도로 제작되었으니까. 그건 카메라의 등장 전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림의 역할이자 존재 의의였다. 변하지 않는 기록과 저장, 전파와 교육의 수단. 그게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오랜 역사를 한 발명품이 무너뜨렸다. 카메라가 나타난 것이다. 카메라는 무엇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그 활약은 지금까지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솜털 하나, 눈빛 하나 어긋나지 않고 순간마저 포착하는 카메라는 기록의 역할을 그림에게서 제대로 빼앗았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은 고리타분하고 의미도 없는 옛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MP3가 한물간 게 되어버린 것처럼.    


 다행히 화가들은 놀랍게도 돌파구를 찾았다. 인상주의며 표현주의가 그 결과물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어차피 즐기는 자들은 사람이니, 현실이 어떻든 무엇이 정확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림으로 가능한 아름다움과 표현이 있다면, 비록 현실과 다른 색과 형태로 그리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던 것이다. 그게 그림의 특징이라면, 의미라면 사진이 할 수 없는 표현이니까! 어찌 보면, 기계 따위가 아닌 사람이 애를 쓰고 노력한 결과이기에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보다 가치가 있다고 봤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이 아닌 것보다 사람이 우월하다고 믿고 싶어 하니까. 어쩌면 이게 정답일까? 그림이 가진 특성과 기계에 대한 우월감? 이를 통해 극사실주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카메라의 등장 이후 화풍은 아주 달라졌다. 그 이전에는 사실적인 묘사를 중요시했다면 이후엔 개인의 개성과 표현이 더 중요시되었다. 카메라에 맞선 화가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껏 해온 것이 의미가 없다면 새로운 의미를 찾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극사실주의와 표현주의는, 정말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같은 환경에서 나왔다 한들 그들의 태도와 화풍은 극과 극이었다. 그러니 극사실주의의 등장은 그림이 가진 특유의 아름다움과 우월감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극사실주의는 대체 왜 나왔을까. 극사실주의란 별다른 의미 없는 일상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그리는 화풍이다. 그게 주변의 식품이든, 공산품이든, 친구의 모습이든 간에. 1960년대에 시작한 화풍은 팝아트와 같이 일상을 그림으로 옮겨와 그림의 의미, 존재 의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는 데 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엔 팝아트만큼 공산적이지도 인조적이지도 않다. 또 극사실주의가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방법이라며 어디서는 현실을 지나치게 적시해, 불쾌할 정도의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극사실주의의 결과물보다 그 주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은 중요하지 않고, 화가가 중요하단 이야기다. 극사실주의 작품은 사람이 그린 것이다. 놀랍도록 현실적이고 세밀하고 살아있는 듯한데 모두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그게 중요하냐고 내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나 잠시 생각해보라. 같은 풍경, 같은 사람이어도 사진과 그림은 아주 대우가 다르다. 왜냐하면 그림은 사람이 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기계보다 사람이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안겨준다. 사람에게 사람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지, 뽐내는 이유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과시욕을 충족해주는 화풍! 그게 극사실주의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어떻게 과시욕 같은 쓸데없는 이유로 그런 큰 변화가 일어나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나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자연을 보라고 답하겠다.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데, 사람 역시 동물이다. 동물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도 담고 있다. 공작은 얼마나 쓸데없이 화려한 꼬리를 가지고 있던가. 수사슴은 또 얼마나 걸리기 쉬운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던가. 죄다 살아남기엔 꽝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진화한 이유는 하나다. 그런 과시를 함으로써 자신이 힘 있고 멋있다고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람 역시 다르지 않다. 아무 쓸 데 없는 광석을 보석이라 칭한 건 누구였던가? 보기에 좀 예쁘다고 할 필요도 없는 천을 두르거나, 몸에 구멍을 뚫고, 온갖 장식에 허례허식을 한 종족은 누구였던가?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 과시욕은 절대 잠깐 지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 만든 기계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걸 기계가 본다고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위에서 말한 과시는 단 한 가지 목적이다. 사람이 스스로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자기 최면이나 자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람은 대단하고, 기계도 이기고, 못 이기는 게 없다고. 극사실주의는 그중 일부로, 기계보다도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게 사람이라는 과시욕을 충족하기 위해 태어나 이어져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너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자신감을 위해 그 정도 과시욕이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인간사의 흔한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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