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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ul 30. 2021

모두 같아도 다르다는 교훈

<데칼코마니 미술관-전준엽>을 읽고

가요는 늘 사랑타령이라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곤 한다. 사랑 말고도 주제가 얼마나 많은데 맨날 사랑만 노래한다며 투덜댄다. 나이가 많든 어리든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다면서…. 어찌 보면 합당한 비판 같아서 어찌 대해야 하나 어려웠는데, 뜻밖의 결론을 만났다. 그 점에 대해 김이나 작사가님은 한 줄로 일축하신 것이다. ‘사랑 노래 말고도 좋은 노래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사랑만큼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적인 주제는 없다’라고 말이다. 그게 사랑 노래는 어떤 방식의 사랑이든 계속 나오는 이유라 했다. 그래서 더욱 시선을 끌고,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결국, 사랑노래는 좋은 노래들 중 일부지만 그만큼 인기 있기는 힘들다는 소리다. 나는 주제에 대한 이 이야기가 모든 예술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세상사는 복잡하지만, 그 속의 주제는 몇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사랑, 이별, 자아 성찰, 사회 비판, 고독, 일상, 이 6개의 주제를 제외한 예술 작품이 몇 개나 되겠는가? 거의 모든 작품이 이 주제 안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노래도 마찬가지고 그림도 마찬가지다. 신화와 종교라는 틀만 벗어나면, 결국 그 주제는 큰 차이가 없다. 신화와 종교의 틀을 빌려 많은 화가가 비슷한 평화를 기원하고, 깨달음과 감정을 표현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 역시 그 주제의 유사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실을 눈치채기란 힘들다. 솔직히 나는 그림을 볼 때 그 주제와 의미 찾아보기를 아주 좋아하는데도 동양과 서양을 같은 선에 두기가 어려웠다. 색감이나 구성, 입체적인 표현과 평면적인 표현에서 너무 큰 차이를 느껴서인지…. 같은 주제일지언정 비슷한 인상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칼코마니 미술관>에서 모아둔 것들을 보니 색달랐다.      


알브레히트 뒤러, 1500년의 자화상
윤두서, 자화상

그중 제일 인상 깊은 건 역시 자화상이었다. 유명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의 자화상>과 윤두서의 자화상을 함께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화풍과 외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화가의 눈빛과 표정은 똑 닮아 있었다. 심지 곧고 자신감 넘치는 눈은 자신들의 긍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뒤러는 예술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못마땅해해 자신을 예수처럼 그려 예술의 숭고함과 자존심을 풀어냈는데, 최고의 방식이 아닌가 싶다. 반면 윤두서는 그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라기보단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었다. 시, 서, 화에 능한 조선 사대부로 선비의 삶을 살아낸 그는 뒤러의 젊은 패기와 의지와는 다르다. 인생을 뚝심 있게 살아왔다고 할 정도의 굳센 세월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온’ 사람의 차이임에도 그 눈빛은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리 닮았는데도 담긴 의미와 세월이 다르다는 게.     


프란츠 할스, 유쾌한 술꾼
김후신, 대쾌도

자화상에선 너무나 닮은 모습인데도 다르단 점에 놀랐다면, 놀랍도록 유사한 모습과 유사한 분위기에 놀란 작품도 있다. 프란츠 할스의 <유쾌한 술꾼>과 김후신의 <대쾌도>가 그 주인공이다. 둘 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술에 빠진 취객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라 그런 걸까? 유쾌한 술꾼은 정면을 바라보며 붉어진 얼굴과 흐트러진 손짓을 한다. 대쾌도에서 취객은 입을 크게 벌리고선 열 오른 얼굴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 하나는 짙고 어두운 색감이고 하나는 투명하게 보일 정도의 부드러운 색감인데 취한 사람이 똑같이 보이니 그 유사성이 놀랍다. 취한 모습은 오래 보일지언정 그 모습을 담기가 쉽지 않다. 가장 흥에 올랐을 때는 의외로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그 잠깐, 절정의 순간을 그대로 담아냈다. 어쩌면 그 감정의 순간이 똑같아 같은 분위기가 가득한 걸지도 모르겠다. 윤두서와 뒤러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해 세월의 차이에도 똑같은 눈빛을 했듯이 말이다.     


카라바조, 나르시스


강희안, 고사관수도

다만 어쩔 수 없이, 같은 주제임에도 엄청난 차이가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모두가 그런 ‘같은 분위기’를 풍기진 않았다. 카라바조의 <나르시스>와 강희안의 <고사 관수도>가 그랬다. 사실 제목만 봐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나르시스와 공부하는 선비는 정말 다르니까. 두 그림은 같이 봐도 주제가 같다고는 모를 정도다. 나르시스는 물에 빠질 듯, 다가갈 듯 황홀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고 분명한 색채와 물에 비치는 인물의 모습이 그런 분위기를 강조한다. 공부하는 선비는 정확히 그 반대다. 한눈에 보기에도 느긋하고 편안하다. 언뜻 보면 선비를 못 찾을 정도로 자연 속에 녹아들어 있는데, 물은 아래에 잔잔히 흘러갈 뿐이다. 화풍도, 구성도, 인상도, 색감도 모든 것이 다르다. 어쩌면 이게 동서양의 자연스러운 차이일지도 모른다. 카라바조는 재능과 자기애에 대해 다룬 반면, 강희안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자연 속 인물을 통해 나타낸 것이니 말이다. 자연을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쓴 서양과 자연을 녹아들 대상으로 바라본 동양의 그 오랜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난 것 아닐까 싶다.     


동서양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가 더 뛰어나고 어디가 더 멋있다는 이야기는 될 수 없다. 화풍, 색감, 구성, 이것들은 무엇 하나 단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건 개인의 취향에 불과하니까. 그럼 무엇이 중요하냐고? 솔직히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엔 취향을 넘어서는 우월한 작품들이 존재한다는 걸. 그런 작품들이 화가가 어디에서 있었는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토록 유사한 주제로 색다른 작품들이 존재하는 걸 보라. 

다른 의미든, 다른 분위기든, 정도만 다를 뿐 우리에게 모두 깊은 인상을 선물한다.

그 걸작들로 우리가 알아둬야 하는 건, 사람들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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