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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ug 03. 2021

사실 정의는 완전한 적이 없었다

<나는 뉴욕의 초보 검사입니다-이민규>를 읽고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보다 철학적인 질문이 있을까?

사형 제도의 찬반 질문이나 자유에 관한 질문보다도 심오하다.      


어릴 적에 나는 ‘정의’를 참 좋아했다. 타고나길 착한 아이라거나, 모범적인 아이여서가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이유가 전부였다. 정의로운 사람은 늘 멋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오든 그들은 늘 승리했고, 선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안정감이 좋았다. 그들은 결국 이길 것이라는 그런 안정감. 나는 정의를 응원할 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작전을 세우지 않고도, 마음이나 기세만으로도 정의는 승리를 차지했다. 정의의 편이면 모든 것이 쉬웠다. 인물들에게 칭찬을 받고, 선물도 받고, 좋은 일만 일어났다. 악당들이 다치고 힘들어하는 건 ‘올바른 사람들’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그런 정의는, 그런 ‘완전 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시절의 정의는 황홀하다. 아이가 멋모르고 좋아한 정의로운 인물들은 무의식 중에 살아있는 듯하다. 꾸며지고 만들어진 이야기 하나에 정의가 이토록 기꺼워지는 걸 보라. 아이들에게 악당이 지고 주인공이 이기는 걸 보여주는 이유를 절절히 체감한다.  비록 현실과는 거리가 먼 교훈이라도 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뿌리를 내리게 되지 않는가. 효과적이면서도 똑똑한 방식이다. 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여전히 정의 실현이라는 문구 하나에 뭉클한걸 보라. 아주 성공적인 교육방식 같다. 

     

그런 시절을 보낸 덕일까? 난 이상적인 사회를 자주 꿈꾸곤 했다. 안타까운 건 현실은 이상보단 지옥에 가깝단 점이었다…. 세상이 불합리하고 울퉁불퉁하며, 공평하지 않단 걸 알게 되는 건 얼마나 쉬운가. 게다가 내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 고달픔은 커져갔다. 그 고통을 뭐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 머리가 크는 속도는 느린데, 비극이 보이는 건 점점 잦아졌다. 어린 시절 간직한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세상과는 너무 달랐다. 그런 현실은 성장기, 청소년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아직 미성숙했던 나는 그런 괴리를 어찌 견뎌야 하는지 몰랐다. 그나마 겨우겨우 힘들게 내린 결정은 외면이었다. 뉴스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정치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옛날엔 있었던 정의가 지금은 사라진 거라 믿기도 했다. 이상적인 세상은 과거에 있을 거라 여기기도 했다. 지금이 나아진 것이란 걸 인식했다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내게 현실은 이상이 아니란 이유로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그 상태를 쭉 유지할 순 없었다. 그런 사고를 계속해 나갔다면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졌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그걸 인지하고 있었던지,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외면과 마찬가지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현실을 보려고 애쓴 결과였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깊은 고찰이나 사고 없이 한쪽만 비난하는 것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아닌 것처럼 굴었다. 세상에 정의로운 사람은 나만 남은 것처럼 여겼다고나 할까. 그냥 뉴스에서 범죄나 잘못을 다루면, 단편적으로 판결을 내렸다. 특히 부당한 결정을 내놓는 것 같은 판사와 말도 안 되는 변호를 하는 변호사, 어리석은 경찰과 검찰에 그 비난이 쏟아지곤 했다. 그 뒤에 숨은 편파보도나 진실이나 양쪽의 입장은 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어린아이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게 티가 나지 않은가? 그 치기는 세상을 흑백 논리로 보게 만들었다. 정의 아니면 악. 참 쉽고 정확하고 간단한 방식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런 논리가 있는 세상은 적어도 지구 상엔 없다.     

  

세상은 복잡하다는 걸 아는 건 빨랐다. 그런 건 친구들과의 가벼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진리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세상에 확실한 정의도, 확실한 악인도 없다는 것까지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뭐랄까, 세상은 세상이고 이론은 이론처럼 느껴졌으니까. 세상이 어떻든 정의만큼은 단순하고 확실할 것이라고. 그것이 진리고, 그것이 정의라고…. 그리고 그 수단은 법이고 사회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게 영원할 줄만 알았다. 언젠가는 유토피아가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세상을 믿고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쉽게 찾을 수 없는 ‘검사’란 타이틀에 집은 <나는 뉴욕의 초보 검사입니다>의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제약 회사와 관련된 소송을 준비하면서 선배가 그런 말을 건넸단다. 

     

사람을, 세상을 너무 믿지 말라고. 어렸을 때는 세상이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고. 차별도 폭력도 부조리도 탐욕과 이기심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그러니 너무 큰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지 말라고.      

저자는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은 그 말에 수긍을 했고, 자신의 시대에도 유토피아란 오기 힘들 거란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게 정의에 대한 허무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 외면하고, 어리석은 태도를 취했던 나와는 달랐다. 나이도 경험도 상황도 다르니 당연한 차이지만, 나는 이미 잘못된 대응을 한 적이 있어 남다르게 느껴졌다.   

   

저자의 반응은 이러하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스포일러를 알면서도 계속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마찬가지로 완전한 정의는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곳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실험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고. 좀 느리고 답답하더라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 왔고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고…. 나는 정의라는 휘황찬란한 어휘에 홀려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을 못 본 것이다. 나약하고 부족해도 사람을 위로하고 돕는 건 사람밖에 없는데. 이 단순 명료한 진실을, 자명한 윤리를 잊었던 거다. 나는 순간 글 읽어달라 하는 손자를 마주한 까막눈 할머니처럼 무서웠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한번 잘못한 경험이 있으니 더 이상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해야 할 건 정의라는 이념이 아닌 사람을 먼저 봐야 하는 것인걸. 과거에 빠져 지나친 반성의 늪에 갇혀 있으면 독이 될 뿐이다. 여러모로, 이 도서는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나는 여전히 정의가 좋다. 아직도 정의 실현을 사랑하고, 유토피아를 꿈꾼다. 

다만, 이제는 법도 이념도 완전하지 않음을 명심하고 있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고, 믿음직하지도 않지만, 분명 나아지고 있으니까! 

모두가 올바른 정의를 위해 나아가진 않아도, 누군가는 분명 정의를 향해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된다. 

그걸로 내가 정의를 향해 노력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나약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는 정의를 위하여! 우리의 앞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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