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가지 죽음 수업,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데이비드 제럿>을 읽고
어릴 땐 몰랐지만 지금 보면 참 알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나의 경우 그중 하나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바로 “N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람은 자신의 수명을 조절할 수 없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자신의 건강 상태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이니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허황된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분명 말 자체는 깊이가 있지 않았는데 왜 이리도 기억에 깊이 남아있을까? 아마 10대의 아이가 꿈꾼 앞날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지루한 공부에 갇혀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런 이야기는 한두 번 나온 게 아니었다. 우리, 그러니까 나와 내 친구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의 예상처럼 마냥 희망찬 이야기만이 오가진 않았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뜨거운 이야길 하곤 했다. 결혼이나 출산, 아니면 장수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장수의 두려움에 대해 자주 떠들었다. 젊다기보다 어린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수든 죽음이든 중학생들에겐 똑같은 무게였으니까. 게다가 늙는 건 죽는 것보다 흔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우리는 치매에 대해서, 입원 생활에 대해서, 못볼꼴인 가정사에 대해 토로하곤 했다. 결론은 늘 비슷했던 것 같다. 일부를 제외하곤 다들 너무 늙지 않은 나이에, 청년기에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변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자신의 인생을 더 챙겼고 건강에 신경을 기울였다. 영양제라는 주제는 꼭 한 번쯤 등장했고 병원 방문도 잦아졌다. 그 사이 주변의 죽음을 목격하고, 세상의 매혹적인 자태를 마주해서일까? 나 역시 그런 흐름에 함께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생각한 죽음은 너무나 심오했던 모양이다. 여전히 내 뇌리에 선명한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따금 죽음에 대한 책을 잘 지나치지 못한다. <33가지 죽음 수업,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도 그렇게 마주한 책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떻게 늙을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어떻게 죽을지도. 그나마 제일 가깝게 생각한 건 사후 장기기증을 하고 싶다 정도? 그러니 주변의 죽음을 보면서 내게 스며든 건 두려움이 유일했다.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 고통스러워하다가 죽고 싶지 않다. 그런 모습으로 늙고 싶지 않다…. 이상적인 죽음을 꿈꾸고 있단 걸 모르지 않았다. 현실은 그와는 아주 멀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 바람을 놓지 않고 살고 있을 것이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의사조차도 그러고 있으니까.
다만 의사의 다른 점은, 어떻게 해야 그런 이상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안다는 점이다. 그건 운동을 하거나 담배를 끊는, 건강과 관련된 흔한 상식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잔인한 의견에 가깝다. 내가 늙어서 위험한 질병이나 사고에 마주했을 때 굳이 소생 시도를 하지 않음으로써 내 괴로움을 연장시키지 말라는 이야기니까. 이건 남은 가족에게는 너무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는 말한다.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떠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냐고. 노인은 아프기 마련인데 그 원인은 늘 복합적이어서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을 확률도 너무나 높다고. 의사는 그저 가장 높은 가능성의 대응을 할 뿐이라고.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의 나날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환자가 살고자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고통으로 의식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미미한 효과를 보이는 치료를 하는데 신경 쓰느라 다른 환자들에게 갈 수 없다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건 무엇이냐고.
나는 이 말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에 대해 덜 신경을 써도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런 마무리를 원하기에 그랬다. 모두가 아니라 나처럼 그런 마무리를 희망한다면 소생 시도를 안 해도 된다는 증거를 남기는 게 하나의 방법일 수 있구나.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의식이 없을 때도 내 의사대로 진행될 수 있단 이야기이니, 장점이 있다고 여겨졌다.
저자는 외딴 지역에 파견 갔을 때 사냥꾼으로 살아온 노인을 보았다. 고령임에도 그는 여전히 사냥을 떠난 상태였는데, 그 모습에 저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벌판에서 시신으로 발견될지도 모르지만, 그 노인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니까. 그 노인은 입원한 사람들보다도 나이가 많았는데, 훨씬 활기찼다.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은 나날이기에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살아온 방식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라…. 한 곳에서 사는 건 힘들겠지만, 내 취향 내 인생이 묻어난 장소에서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런 죽음이라면 두려운 비극이 아니라 맞이한 일상의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모두가 한 번씩만 겪을 수 있고 돌아올 수 없다. 어차피 경험할 일, 어떻게 맺음하고 싶은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너무 두려워하지도 멀리하지도 말고, 그냥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마무리를 원하는지 좀 더 이야기해보면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마무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