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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ug 19. 2021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소시민이 느끼는 현대의 흐름에 대한 시선

나는 내가 역사 속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 민중이나 군중이란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역사란 이름이 붙으려면 뭔가 장엄하고 무거운 흐름 속이어야 한다고 느껴졌다. 내가 배운 역사, 특히 현대사가 그리 밝은 기록이 아니기 때문일까? 대통령이 바뀌고, 정책이 바뀌고, 외국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난민이 발생해도 내가 역사의 흐름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생활은 그저 평화롭고 소소하고 평범한 날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젠 내가 겪은 것들이 반드시 역사에 나올 것이란 직감이 든다. 6·25 전쟁을 겪은 할머니와 민주 항쟁을 겪은 부모님처럼 말이다. 

    

솔직히 좀 무서울 지경이다. 나는 한 개인에 불과한데 너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언제부터 그런 걸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언제부터였을까…. 대통령이 국정농단을 일으켰을 때부터? 아니면 그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인한 평화 시위로 몰락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면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부터였을까? 아마 코로나가 가장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큰 선을 그어주지 않았던가. 나는 20년을 코로나 없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이젠 마스크 없이 외출은 꿈도 꾸지 못한다. 코로나가 나타난 건 고작해야 2년 정도인데 말이다! 나도 이런데, 유치원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은 얼마나 괴리감을 느낄까. 한 10년만 지나도 코로나 사태란 이름으로 교과서에 실릴 것 같다. 그때 각 나라가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뭐가 원인이고 어떤 흐름이 진행되었는지 모두! 사실 코로나 사태가 역병 창궐이라는 끔찍한 일이라 다른 일들과는 다르게 느껴질 뿐, 경험은 모두 과거에 불과하다. 과거는 곧 역사가 되기 마련이고. 내가 역사 속에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한 소리일 수도 있다. 내가 이승만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배우듯, 언젠가 학생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배우는 날이 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그 흐름은 기록되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되곤 하니까. 그런 날이 오면 나는 그때 그 시절을 겪은 세대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역사, 역사의 산 증인이 되는 셈이다. ‘살아있는 역사’란 명칭은 참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당연한 일인데도 여전히 무서운 건 왜일까. 어쩌면 앞날이 가늠이 안 되는 탓일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의 앞도 모르는데 세상의 앞을 어찌 알겠는가. 그럼에도 모른다는 건 불안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라, 나는 그런 무서움이 가득한 것 같다. 물론 모든 두려움이 결이 같은 게 아닌지라, 제일 무서운 건 따로 있다. 두려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는데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겠느냐고. 혹은 인간이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무슨 소릴 하냐고. 뉴스를 틀어보라. 미얀마의 쿠데타 이야기가 나온다. 민주주의를 위한 청년들의 피는 옛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 겹쳐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이 재집권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비행기에 어떻게든 함께 가려다 추락해 죽는다. 대통령은 홀로 떠났고, 피난 행렬은 줄을 잇는다. 말랄라의 흉터가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악몽이 반복됐다. 나는 21세기에 이런 모습이 나타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세상에 미래가 있다고 하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미래가 좋아질지 나빠질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까. 미래는 흔히 희망적이지만, 그 미래가 부정적이라면 끝보다도 절망적이다. 슬픈 일이다. 게다가, 굳이 그런 항쟁이 아니더라도 세계에 휘몰아치는 자연재해를 보라. 암담하다. 우리나라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해서도 지나가서도 안 된다. 이미 세상은 한 이웃이 된 지 오래라, 문제가 일어났다면 결국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세상이 어찌 변하려고 이러나. 이 말은 전 세대에 존재했던 말이다. 고려 때 몽골이 쳐들어왔어도, 조선 때 전쟁을 겪었을 때도 개화기며 을사늑약 당시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그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고비를 이겨왔다. 비록 예전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늘어나고 신경 쓸 것도 많아졌지만…. 그만큼 우리는 많은 걸 누려왔고 즐겼다. 그러니 하필 왜 이럴 때 태어나서 고생이냐는 말은 접어두자. 그리 따지면 고달프지 않은 시기는 없다. 그 대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짐을 기억하자.  

    

우리가 환경을 신경 쓰면, 언젠가 환경오염은 줄어들 것이다. 없어질지도 모른다. 문제점을 고치려고 노력하다 보면 분명 그 성과를 느낄 것이다. 전쟁 없는 사회를 위해 계속 나아가면 전쟁은 사전에서나 존재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의 행동은 ‘한 명의 일’에 불과하지만, 사실 역사의 흐름을 만드는 일손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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