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aning Flower-소설 <작은 아씨들>에 나온 제비꽃(팬지)
분명 같은 책인데, 어린 시절 읽었던 것과 너무 다른 감상이 나올 때가 있다. 작품은 그대로지만 독자가 성장하며 변화한 탓이다. 조금 신기하고, 당혹스러운 이 일은 내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나의 경우엔, <작은 아씨들>이 그 대상이었다.
<작은 아씨들>은 그야말로 소녀 소설의 명작이다. <소공녀>, <키다리 아저씨>, <비밀의 화원> 같은 비슷한 계열의 문학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매력을 뽐내지 않던가.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네 자매의 이야기는 형제자매 없는 내게 참 흥미진진했다. 때론 싸우고 때론 머리를 맞대어 이런저런 일상을 채우는 이야기가 그토록 부러웠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펼쳐 보니, 자매의 좌충우돌은 보이지도 않았다. 성장한 이후의 나날이 너무 씁쓸했던 것이다. 환호했던 메그의 결혼은 떫은맛이 났고 로리와 에이미의 인연은 거부감이 먼저 들어, 도저히 편하게 읽어 내릴 수가 없었다. 모든 이들이 완벽한 행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함을 알고 있음에도 나의 작은 아씨들은 다를 줄 알았다. 특히 한 송이 제비꽃 아가씨였던 베스는 더더욱 남다른 행복을 쥐길 원했다.
나와 가장 겹쳐본 조도 아니고, 가장 이상적으로 여긴 메그도 아니고, 재능이 탐났던 에이미도 아닌 베스에게 가장 마음이 쓰인 이유는 단순하다. 베스가 비현실적일 만큼 선하고 바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에겐 결국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거기다 또 하나, 나이가 들수록 착한 사람이 더 귀하다는 걸 실감한다는 이유도 있다. 착한 사람은 단단해야 버티고, 그 굳건한 지향은 무엇보다 빛나는 가치를 지닌다. 그런 베스의 성품은 로렌스 할아버지께 보답으로 슬리퍼를 만들어 드릴 때 드러난다. 짙은 자주색을 배경으로 삼색제비꽃(팬지꽃)을 수놓은 슬리퍼는 베스의 고요하고 따스한 마음이 담겨있음을 제대로 보여준다. 꽃말까지도 베스답다. ‘나를 생각해주세요’라니, 조심스럽게 정성을 전달하는 게 전해지는 의미다.
고대, 팬지꽃은 저런 꽃말 덕에 사랑 고백에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신화에서도 그 의미를 표현하길 큐피드가 ‘사랑하게 되는 화살’을 하얀 제비꽃에 잘못 쏘아 상처 입은 제비꽃이 팬지가 되었다고 할 정도다. 사랑의 화신인 큐피드가 등장해야 설명할 수 있던 상징이라 볼 수 있겠다. 어느 모로 보나 연인에게 어울릴 법한 꽃인데, 베스의 손에선 할아버지에게 감사로 피어난다. 어떤 꽃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주느냐가 중요하단 게 이런 데서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베스의 선물은 반드시 제비꽃이어야 했다.
제비꽃이 색별로 의미가 달라 삼색제비꽃을 앞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 자체는 사실 굉장히 수줍은 꽃이다. 땅에 하도 낮게 피어서 제비꽃을 구경하기 위해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지 않은가. 이런 특성 탓에 유독 제비꽃은 겸손의 의미도 많이 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관용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되는데, 벽의 꽃(wall flower)이 '파티나 사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벽에만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과 유사하다. 쪼그라드는 제비꽃(shrinking violet)이라는 단어가 그 사례다. 종종 나오는 이 표현은 흔히 '내성적이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조용한 성격의 사람'을 가리킨다. 작중 베스가 언니들이 열광하는 무도회에 관심 없는 면이나, 낯을 많이 가리고, 조용한 생활을 선호하는 걸 감안하면 도저히 제비꽃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베스의 선물이 제비꽃이어야 했다고 말한 이유다. 의미도 적절하고, 자신을 식물로 형상화한 듯한 꽃이니 말이다.
사실 성인이 된 후에 예전 좋아했던 책을 보면, 온전히 좋은 감정으로 남는 경우가 더 적은 것 같다. <초원의 집>도 정말 열광했던 작품이지만 지금 보면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져 마냥 달갑지 않다. <소공녀>도 그 시대상의 불평등과 아동학대가 먼저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더 이상 그때의 순수한 감탄과 즐거움을 접할 수 없다. 그래도 좋은 건, 더 깊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예전의 작은 아씨들이 그립지만, 커서도 여전한 메그의 성숙함, 조의 노력, 베스의 선함, 에이미의 당당함을 사랑한다. 예전엔 내가 좋아하는 한 인물을 정해두고 그 인물에 맞지 않으면 싫어했었는데, 이제는 다양한 이들의 장점을 보게 되었다. 처음 제비꽃 슬리퍼를 봤을 때도 그랬다. 그땐 왜 소박한 꽃을 했을까 불만이었는데 지금 보니 딱 적절한 선택이었다. 크고 나서야 안목이 생겨서 그런가 보다.
어쩌면, 삼색제비꽃의 꽃말은 독자에게 남겼던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다. 자매들 중 가장 존재감 없던 베스가 로렌스 할아버지를 포함해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작은 아씨들>을 기억해주세요. 나를 기억하고 사랑해 주세요.
나는 그 의도대로 베스와 제비꽃을 오래오래 떠올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