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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18. 2021

찬란한 장미 덤불, 공주

<무서운 공주들-린다 로드리게스 맥로비>를 읽고

나는 공주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공주가 받는 교육과 권력을 좋아한다. 지배의 입장에서 운영해야 하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권위가 넘치는가! 게다가 잘하면, 후광까지 보일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기대와 달리 운영을 못 했던 왕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왕족, 귀족이라는 고귀한 이미지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 법. 그 오랜 봉건 세월 동안 만들어진 이미지가 그리 쉽게 깨지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지도자의 모습을 갖춘 공주들의 모습은 정말 찬란했다. 딱딱한 활자에서 나오는 기상이 드높아 보일 지경이었다. 레슬링으로 유명했던 공주, 한때의 사치가 무너져도 다시 일어선 공주, 타락한 악녀로만 보였지만 정숙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공주, 살아남아 평생 사랑받고 산 공주, 머리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공주. 이 많은 여인은 모두 공주라기보단 여왕이라는 자태가 어울렸다. 물론 괴기할 정도로 미친 공주, 성에 미친 공주, 사치에 온몸을 내던진 공주도 있었으나 나란 사람은 불행보다 행복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 화사한 영광에 빛나는 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중 제일을 꼽자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몽골의 레슬링 공주, 쿠툴룬이다. 설마 레슬링으로 대결한 공주가 <투란도트>의 원형이었을 줄이야! 프랑스의 동양학자와 이탈리아의 극작가를 거쳐 나온 이야기는 정말 달라졌다. 오히려 투란도트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탈란테 공주가 더 어울린다. 달리기에 재빨라 어떤 구혼자도 물리쳤다던 그녀의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쿠툴룬과 비슷하다. 두 여성은 남자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체력과 운동 실력이 있었고, 그걸 뽐낼 자리에 나설 수도 있었다.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인데 동서양은 결국 하나의 얄팍한 벽을 사이에 둔 같은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이야기건 동양은 동양 배경으로 풀어내고, 서양은 서양 나름대로 풀어내니 말이다.      


쿠툴룬의 레슬링 실력이 얼마나 전설적이었으면 아직도 앞이 풀어 헤쳐진 긴 소매의 조끼만 입어 가슴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레슬링의 규칙일까? 아마조네스의 전사들이 활쏘기에 방해된다고 왼쪽 가슴을 잘랐다는데 그 전설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그녀들의 명성을 짐작하는 증거가 남아있다는 게 기쁘다. 다만 쿠툴룬이 달랐던 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아 그와 결혼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이다. 보통 그렇게 전사로 표현된 여인들은 불행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게 원칙 아닌 원칙인데(아탈란테가 그랬고 아마존의 여왕이 그랬듯이) 쿠툴룬은 정말 드문 예시다. 아쉽게도 여 족장의 자리에 오르지도 여전사로 잘 남지도 못한 것이 한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녀의 실력을 느낄 수 있으니 참 행운의 별에 살았던 멋진 공주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공주는 평양 공주였다. 수나라 후반에 일어난 모반으로 당나라가 세워진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뒤에 평양 공주가 있음은 알지 못했다. 그 시대에 넘치는 지략과 보여준 품위는 아버지인 황제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군례로 장례 지내진 공주가 역사상 몇 명이나 될까? 그녀가 오래 살았다면 정말 측천무후 이전에 여황제로 즉위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측천무후의 시동생 입장이니 측천무후의 등장을 예감하고 그녈 돕거나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만한 통찰력과 실력이 있는 여인이 아닌가. 사실 그녀만 한 통찰력과 실력을 지닌 여인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서 ‘영리하고 총명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던가. 다만 주위에서 그런 여인을 인정해주는 사례가 적었을 뿐이다! 평양은 그런 점에서 넘치는 인정을 받아 내가 더 뿌듯해지는 것 같다. 더군다나 대내외적으로 모두 존중을 받았으니 대단하다. 자신의 재능이 빛나도 환경과 주위 사람에 의해 묻히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쿠툴룬이나 평양이 가장 인상에 남는 이유는 넘치는 서양 공주 사이에서 빛나는 동양의 여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쉽다. 공주라 표현한 여인에는 황후, 왕비, 공비, 공주 모두가 포함되는데 너무 서양의 공주들만 담겼다. 서양의 사람이 쓴 책이니 당연히 있는 한계로 보인다. 대신 영국이나 미국, 서양권의 나라에서 보였던 상황이나 역사 속 사실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느 책이든 장단점은 있는 법이니까. 한때 달러 공주라고 불리며 영국과 유럽의 귀족과 미국의 부호가 결혼한 사례에 대해서도 잘 나와 좋았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공주들이 눈에 띄이는 이유는 드물게도 행복한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공주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도 힘들었고, 자유가 극히 드물었다. 평양공주만 봐도, 아버지와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상황 자체는 참 힘겨운 전쟁 상황이었다. 때로는 인질이었고, 때로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 흔했다. 기세와 재능이 남다른 사람들은 넘쳤지만 늘 재능이 빛이 발하는 것이 좋은 건 아니다. 잠자는 호랑이의 발톱을 건드리고, 용의 수염을 건드리지 말라. 호랑이의 위엄과 용의 품위를 알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화를 부를 테니까. 세상 이치는 그렇다. 무엇이 빛을 발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곱게 얻어지는 건 없다.     


결국 이것은 명확했다. 나는 예전에도 공주로 살고 싶다는 환상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없을 거라는 걸. 그녀들이 누린 권력이나 표현한 능력은 대단하지만 나는 내가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막강한 책임과 무거운 자리에 눌려 미친 여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교황의 음식을 빼앗아 먹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여인이 되느니 고단하더라도 자리를 지켜 노동하는 여인이 나으리라. 이렇게까지 생각하다 보니, 제목이 굉장히 양면적으로 느껴졌다. 무서운 공주들이라, 말 그대로 무서운 공주들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무서워하는 공주들일 수도 있겠다. 공주라는 직위는 장미 덤불과 같아서 아름답지만 아픈 자리이니까. 그 안타까운 운명에 이기지 못한 여성들을 위로하며, 지금의 신분이 없는 자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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