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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19. 2021

변해야만 하는 1순위, 학교

<어디서 살 것인가-유현준>을 읽고

학교는 왜 있을까? 존재 의의가 있는 걸까? 이 뜬금없는 질문을 생각한 건 재수학원을 다닐 때부터였다. '학교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체계적인 스케줄과 교육 수준이 학교에 전혀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보다 더 효율적인 학습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왜 학교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내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보다 훨씬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정하고,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니 성적도 크게 올라 입시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다. 고3일 때 학교에서 각종 수행평가와 생활기록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치여 수능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던 것과는 달랐다. 공부의 결과만을 원한다면 학교에 가는 게 손해라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시스템이 압도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더 고심해 본 결과, 내가 낸 결론은 ‘학교는 친구를 만들고 사회생활을 연습하기 위해 가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불필요하다고 여긴 학교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 고등학교의 시간이 마냥 쓸모없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친구들이 있어서였다. 그때 친구들과 어울리고 추억을 쌓았던 시간만큼은 소중하고 아깝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했었기에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었을 때 학교에 관한 부분에서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학교 건축이 교도소와 같다고 표현했다. 둘 다 담을 넘으면 큰일이 나며, 운동장 하나에 4~5층짜리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창문 크기를 제외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밥을 배급받아 먹는 곳은 교도소, 군대, 그리고 학교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은 정점을 찍었다. 물론 이런 규칙의 배경에는 공평한 생활을 위한 것이란 전제가 있다. 교복 자율화를 시행할 경우 집안 형편에 따라 옷차림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차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식과 교복은 학교 차원에서 지원이 가능하니 더 공평하게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 하지만, 교복이나 급식과는 달리 건축물은 똑같을 마땅한 이유가 없다. 교복이나 급식에 있어 다양성을 주지 못한다면 건축을 바꾸는 것이 좋은 시도가 아닌가. 12년을 비슷비슷한 공간에서 생활한 아이는 저자의 말처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주의적인 공간에서 지내게 되고, 그렇게 지내다 똑같은 납골당에 나란히 안치된다. 생각만 해도 의미도 없고 단조롭기만 한 인생이다. 그런 인생은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냐고 무슨 문제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주의에 희생된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이미 다들 알고 있다. 다른 것을 틀린 취급 당하며 조금 다른 것을 이유로 부당하게 괴로움을 겪는 건 사회의 고질병이다. 일부의 문제가 아닌 계속해서 문제가 생겨나고, 숨겨진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학생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했듯 사람은 건축의 영향을 받는다. 굳이 저자의 전문적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넓고 깨끗한 도서관에서와 아늑한 카페에서 느끼는 기분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도서관은 조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책이 가득 배열되어 있어 규칙이 느껴지는 공간은 함부로 다닐 수 없다. 카페는 대부분 음악을 틀어두어 몸이 이완되고, 아늑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보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카페와 도서관은 모두 아주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기껏해야 평균 1, 2시간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은 모든 사람이 이해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시간, 그것도 12년을 보내는 학교는 어떻겠는가. 학생들에게서 생겨나는 병리적인 현상이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저자가 디자인했다는 공간은 매력적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는 주제로, 먼저 중고등학교 운동장을 가운데에 있는 숲 공원으로 옮긴다. 서너 개의 교실을 모아 1, 2층 주택 같은 크기의 교실 동을 만들고 그 앞에 각기 다른 모양의 마당이 있게 하면, 스머프 마을 같은 학교가 나온다. 내가 학생이라면 당장 가고 싶은 학교의 모습이었다. 이동하기 쉬운 저층인 데다 다양한 마당이 있어 재밌으니 싫어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어른’만의 입장이었다. 착잡할 지경이었다. 마당 구석에서 폭력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라니. 학생인 처지에서 말하자면 감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교사들이 성공적인 감시를 한다고 느낀 지금의 공간에서도 그런 폭력은 넘쳐나고 있으니까. 오히려 공간을 풀어주어 스트레스를 덜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나올 수도 있다. 물론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완벽한 공간이란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런 점을 넘어 공립이기 때문에 뛰어난 학교는 만들기 어렵다니. 공립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이런 태도가 공립이라는 이름을 더 낮춘다고 생각한다. 나라의 입장에서 짓는 건축이 개인이 사비를 들여 건축하는 것보다 못한 수준이라면 괜찮은 것일까? 하나를 시작으로 개선해나가면 될 문제를 굳이, 차별이 나타날 수 있다고 거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서부터 우리의 학창 시절에 이어, 현재까지도 학교란 건축은 큰 변화 없이 여전하다. 삐삐에서 스마트폰으로, 큼지막한 헤드셋에서 무선 이어폰으로 바뀌는 동안 제일 중요한 건축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생각해야 할 문제점이다.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사회의 핵심 건축인 학교가 그대로인 것이 의미가 있을까? 고질적인 문제가 계속해서 드러나는데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금까지 이대로 해왔으니’라는 이유만으로 이대로 계속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길 손꼽아 기다리는 정도의 건축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교도소 같은 건축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씩 바꾸어 개선해나가면서, 학생들이 자연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지키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에 나와 산책하고 운동하다가, 수업을 들으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곳을 만들었으면 한다. 훗날 우리의 손자, 손녀 때에 우리의 학교를 이야기하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냐고 놀랄 정도로 학교의 건축이 바뀌길 바란다. 학생, 학부모, 사회까지도 웃으며 행복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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