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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22. 2021

아름다운 이데아를 향하여

<동화 넘어 인문학-조정현>을 읽고

나는 한 번도 백설 공주의 계모가 능동적이지 않은, 수동적인 여성이라고 본 적이 없다. 본인의 능력이 있고 명령을 내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행동하는 모습은 악할지언정 능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처 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남성의 목소리로 그녀를 휘두르던 거울을.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백설 공주가 수동적으로 살았지만, 계모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리고 백설 공주의 어머니도 상처보다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움에 집착했던 사람이었음을. 계모의 거울은 타인의 시선이었다는 것은 거대한 충격이었다. 현대의 거울이라고 텔레비전을 비유한 것이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 결국, 외모지상주의에 휘둘린 한 왕가의 이야기인 것이다.  

    

백설 공주 이야기가 그토록 유명해서 얼마나 많은 어른에게 악영향이 남았는지 생각하면 안타깝다. 예쁜 쓰레기라는 말이 언제부터 통용되고 있었던 걸까? 물론 미를 탐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과도 같아서 무시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안정을 느끼니까. 하지만 ‘쓰레기라도 예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 같다. 예쁘니 소비가 정당하다는 논리는 한편으론 아름다움의 가치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론 뿌리 깊은 외모지상주의를 보여준다. 나 역시 몇몇 아름다운 장식품을 보면서 ‘예쁘면 됐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아무리 물건을 칭하는 표현이고, 사람과 물건은 그 가치가 천지 차이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적어도 ‘예쁘면 된 거다’라는 사고는 잘못하면 오용될 수 있다. ‘얼굴 보고 산다’, ‘얼굴값 한다’라는 말이 지금까지 통용되는 걸 보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그 말은 살아있다. 외모가 너무 지향점이 되는 게 아닐까?      


이는 다른 동화인 미운 오리 새끼와도 연결된다. 미운 오리 새끼가 ‘타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고, 어느 날 타인이 아름답다고 말해주자 겨우 안심한 안타까운 존재의 이야기’라고 생각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문제에서 두 이야기는 멋지게 맞아떨어진다. 당연하게도 ‘다른 것’은 ‘못생긴 것’이라는 표현이 자리 잡은 것. 결국, 주인공 백조는 오리인 채로는 행복하지 않은 것. 끝까지 자신의 자아를 눈으로 보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맡긴 것. 이 비극을 어떤 말로 달랠 수 있을까. 타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최고의 성취이고 그 성취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견뎌야 한다는 교훈은 부르주아 사회가 그 구성원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아래에서 오리처럼 개인의 자아는 처절하게 밟힌다. 그래서 오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는 현대인의 모습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모습에 맞추려 자신을 바꿔나간다. 외모, 경제력, 어쩌면 성격까지도. 그러나 이런 방식은 반드시 지치는 순간이 온다. 자신이 무엇인지 헤매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페터 비에리는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당나귀를 타는 방법만큼 어렵다.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켜야 행복의 길이 열리는데도 많은 사람이 기준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가볍게 여긴다. 그럴수록 힘들어질 뿐인데도. 그래서 저자는 그럴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누구인지 인식하라고, 인간은 다행히 생각보다 강한 존재라서 먼저 빗장을 열어주기 전에는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고 말이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아름다움은 어디까지 존중해야 할까?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하는 개념일까? 미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위생을 찾았고, 건강을 찾았다. 동시에 독을 섭취하고, 병들어가기도 했다. 사랑만큼 양면적이고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사랑은 인간관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진지하게라도 받아들여지는데, 아름다움은 뜬 소리 잡는 이야기라고 핀잔받기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해 더 생각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 그에 대해 성찰하고, 잘못된 점을 깨닫고 개선하려는 순간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비현실적이라 해도 언젠가 반드시 이상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외모지상주의 따위가 아닌 아름다운 이데아로서. ‘완벽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가 받아들이길. 고양이와 개의 아름다움이 다르고, 청자 백자의 기품이 다른 것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정립과 이해가 더 나아가길 바란다. 그것이 진정한 황금 시대, 이데아로 가는 경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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