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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25. 2021

결국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나는 스쿨버스 운전사입니다-크레이그 데이비드슨>을 읽고

솔직히 말하면, 스쿨버스는 나에게 일종의 환상이었다. 누구나 그런 게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매체로만 접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뭔가 ‘있어’ 보여서, 경험하고 싶은 것들. 둔탁한 버스가 참 매력적이었다. 그 안에 타기만 하면 없던 집중력도 생기고, 사교성도 높아질 것만 같았다. 눈에 확 띄는 노란색도 특유의 개성으로 보였다. 그래, 나는 딱 이 정도의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특수아동이 스쿨버스를 별개로 타서 때때로 손가락질받는다는 것도 몰랐고, 스쿨버스 운전사에 대한 인식도 몰랐다.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너무 당혹스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제목만 봤을 때는 노련한 버스 운전사가 오랜 세월 운전하면서 겪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1년간의 초보 버스 운전사의 이야기였다. 그것도 특수아동 스쿨버스 운전사. 내가 알게 모르게 가졌던 편견을 깨면서 읽어나갈 때, 내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이야기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순한 진리.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이 와닿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되새길수록 심경이 복잡해지는 교훈이 말이다. 생각해보노라면, 주위에 사례가 넘친다. 세계적인 가수로 성공한 연예인들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창시절은 부지기수고, 성격 좋고 예뻐 질투를 사는 친구의 남자친구는 쓰레기고, 재능과 적성과 흥미가 맞아떨어져 빛나는 친구는 난독증이 있다. 이런 사실들은 평소 드러내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모두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완벽이란 글자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조금이라도 모자라 보이는 사람에게는 그토록 가혹하면서 말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있기도 하고 후천적으로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존중받으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악의를 가지지 않았다.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멀쩡하게 생기고 잘 자랐단 평을 받아도 쉽게 악의를 가지고 주변을 피로 물들이거나, 슬프게 만드는 사람이 넘쳐 나는 법이니까. 거기다 아이들은 버스 안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조화롭게 소통했다. 기사인 저자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주위를 물들인다. 물론 그 시간이 영원하지도, 마냥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사회나 다름없다. 그들은 존중받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본래 돌연변이나 장애가 있으면 야생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그들은 지금까지 내려온 유전자에 따른 지혜에 반하는 존재이고, 생존하기에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생에 사는 동물들도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그 존재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등생물일수록 왕따에 대해 민감하고 규제하여 처벌한다. 그런 방식으로 무리가 줄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고등생물이라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차이에 민감할까. 그 민감함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인다. 사회적으로 죽인다는 말이 너무 고상하다면, 스스로 죽게 몰아넣는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이 갈색 머리고, 어떤 사람이 검은 머리라고 해서 둘이 머리칼을 잡고 싸우진 않는다. 그건 그냥 다른 것일 뿐이니까. 인종이든, 성별이든, 장애가 있든, 그 모든 차이는 딱 그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 색과 눈 색이 조금 다른 정도. 아, 나랑 다르구나 하고 넘어가는 그 정도. 그 이상 넘어갈 필요가 없다. 색이 다르다고 나와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니까. 그게 그 사람을 얕잡아 보거나 비난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만약 누가 다른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완벽에 가까운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상대를 낮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예의를 갖추기 때문이다. 결국, ‘완벽’에 대한 사회적 생각과 강박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그 형체 없는 말 때문에 스쿨버스의 아이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인지.    

  

우리는 완벽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 완벽하고 이상적이기만 한 것은 없다. 모두가 조금 부족하고, 조금 빛난다. 차이를 차별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서로에 대한 허용을 높여주길 바란다. 아이들의 버스가 아무 일 없이 집에 도착하고 학교에 갈 때 평화롭기를, 지극히 당연한 것을 바란다. 

세상은 결국 아이들처럼 완벽하지 않고 어느 면에서는 서투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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