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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27. 2021

살아가자, 우리는 살아가진다

<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 인생-하수연>을 읽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너무 가볍게 하는 말이 있다면, ‘죽는다’라는 말이 아닐까. 힘들어 죽겠다, 너 때문에 죽겠다, 죽고 싶다. 이 말들은 살면서 한 번 이상씩 하고, 또 듣는 것 같다. 다른 나라에서 이 정도의 표현은 정말 드문 걸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다. 해학의 민족답게 고통을 직설적으로 말해서일까? 어떤 면에선 그만큼 죽음을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      


나 역시 10대 때는 30이나 40대까지만 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상 살 생각을 하니 너무 암담하고, 늙는 것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린애의 오만이었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고 지난 시간만 생각하며 겁먹는 아이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은 짧았다. 그 후로 고작 몇 년을 살았다고, 우스울 정도로 알게 되었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고, 우리의 인생은 쉽게 끊겨도 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고통에 당장 죽는 느낌이 들어도 쉬이 죽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역으로, 죽음이 참 쉽기도 하고 가장 잔인하게 올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내가 10대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그 고통이 무섭고 두려워 나이 드는 것조차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살았든 죽었든 고통만이 눈에 선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나이를 먹었다. 그때와는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저자를 이해하고, 애틋함을 느끼고, 공감하고, 안쓰러워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저자의 스펙에 놀랐다. 이건 내가 대한민국의 사람인 이상 도리가 없었다. 그 누가 한국의 18살이 대학교 졸업전시를 하는데, 주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미국이나 외국이었으면 넘어갔을 것을 한국이라 하니 온 신경이 쏠리는 걸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초반에 쓰러지고 몸 상태가 안 좋아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섬뜩했다. 스펙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활자로 전해지는 것보다 더한 감정이 밀려왔다.


저자가 훨씬 힘겹고 운이 나쁜 경우라지만 미대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다, 졸업전시를 하다 쓰러지고 건강이 나빠지는 건 굉장히 흔한 일이다. 남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폭풍처럼 날 덮쳤다. 신이시여, 저자의 이야기가 나나,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군요. 그걸 인식하고 나서, 저자가 쉬어가는 걸, 멈추는 것으로 인지하지 말고 잘 쉬어라, 몸을 잘 챙기라고 할 때 입원한 선배의 충고를 듣는 것만 같았다. 학점보다도, 경력보다도 건강이 중요함을 알지만 살면서 그렇게 하는 게 쉽지 않다는 핑계로 몸을 혹사하는 걸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운이 조금만 더 나빴어도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에 병원에 실려 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1학년 때는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했고, 그 이후로 대상포진이 재발할까 봐 불안에 떨었다. 첫 끼를 저녁 8시에 먹는 경우도 빈번해서 위장이 남아나지 않았고, 한여름에 가까운 5월에도 늘 새벽에 잠들어 전기장판 없이 자긴 힘들었다. 체력은 떨어져 갔지만 밤샘은 피할 수 없었고,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경우도 흔했다. 나열하고 보니 중환자가 따로 없다. 이게 어딜 봐서 20대 초반 대학생의 몸으로 보일까? 심각성이 절절하다.     


다행히 나는 저자만큼 아프지 않았고, 저자처럼 심하게 아팠던 경험도 없다. 사실 난치병이고 희소병인 만큼 걸린 사람이 많진 않겠지만 저자의 경험이 너무 뼈아파 미안할 지경이다. 내가 저자의 입장이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자신이 왜 아픈지 끊임없이 고찰하고, 많은 것에 대해 기대를 버리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하니까. 그래서 책의 제목이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 인생’이라니.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말이 비단 환자들에게만 힘을 주진 않을 것이다. 아마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리라. 내 인생이니까 병이 있는 인생을 버리고 싶어도, 너무 힘겨운 인생을 버리고 싶어도, 결국 함께해야 한다. 이겨 나가야 한다. 이긴다는 표현이 너무 강요하는 것만 같다면, 살아가면 된다. 그냥 하루하루 보내 가다 보면 살맛이 날 테다. 자신한다! 생각보다 세상은 다채롭고 살 만하다. 언급했듯 우리나라엔 죽음에 대한 표현이 너무 많아 얕보는 인식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만큼 삶에 대해 생각한 흔적이 아닌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잘 살아가기는 어렵다. 끝과 결말을 생각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을 아끼게 되는 법.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아가도 될 것 같다. 덧없이 느껴져도 그 시간은 결국 나를 만들고,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병 완치자의 이야기는 환자들에게만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생존한 이야기를, 투쟁하고 나아진 이야기를 해주어 모두에게 희망과 함께 사람의 긍정적인 면과 인생의 밝은 면을 보여준다. 가장 어두운 곳에 있었던 이들이었기에 밝음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탁월한 재능이 있다. 이건 환자들과 비교한 얕은 우월감이 아니라 고통을 디디고 일어난 사람에 대한 감탄이다. 모든 환자가 쾌차하고, 모든 사람이 밝음 속에서 그 가치를 알고 살길 바란다. 살아가자. 살아가질 것이다. 우리는 잘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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