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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28. 2021

마냥 예쁘지 않은 추억

<키다리 아저씨-진 웹스터>를 읽고

연애편지란 뭘까? 나는 한 번도 <키다리 아저씨>를 보고 로맨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엔 그녀의 일대기 느낌이 더 잘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아니 당연히도 주디가 쓴 편지들도 연애편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서평에서 “주디가 쓴 것이 모두 연애편지가 아니었나”라고 언급하니 생소했다. 되새겨보니 주디는 편지에서 자신이 저비 도련님에 대해 어떤 감정인지 다 얘기했었다. 모든 연애 감정과 생각을 말이다. 그 상대도 알고 보면 당사자였으니 연애편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새로운 인식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읽었다. 아무래도 내가 대학에 대해 가졌던 환상의 제일 첫 시작이 이 책인 것 같다. 현 대학생으로서 느끼는 대학 생활은 차이가 크지만 말이다. 기숙사에 대한 환상의 시작점도 이 책이고… 이 책이 나한테 지은 죄가 크다!     


너무 어릴 때 읽은 책이라는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데 설마 주디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이야. 얼마 전에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어서 굉장한 실망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옛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아닌 채로 존재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했던 부분이 변하기도 하고, 내가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져서 책에 대한 인상이 바뀌기도 한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물론 이 책에 로맨스가 많은가, 적은가에 대한 생각도 있지만, 제일 인상 깊은 건 교육 수준의 변화인 것 같다. 주디가 고등학교도 진학한 후 대학에 갔다고 하지만 그 모습을 살펴보면 현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나 고등학교의 활동이나 고등학교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기하학, 즉 수학의 기본 원리나 라틴어나 프랑스어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생소했다. 왜 지금 이걸 배우지, 하는 인상이 강했다. 체육 대회나 동아리 활동도 고등학교 느낌이 가득해서 대학교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물론 나이대는 지금보다 어렸다고 하지만…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없을 때를 배경으로 하니 답답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리지 못한 게 보이다 보니 행복한 주디의 모습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낭만적이고 좋은 일이라고만 여겼던 키다리 아저씨의 유럽 여행 권유나 특별 용돈, 과한 선물도 마냥 보기 좋지는 않았다. 지미에게 질투한다고 주디의 계획을 막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주디는 엄연한 성인 여성이고 아무리 후견인이 있다고 해도 자기 뜻대로 할 자유가 있는데 주디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것 같아 불쾌했다. 처음 읽을 때는 주디가 왜 그토록 불쾌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로맨스의 과정 하나로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 불쾌함을 이해한다. 키다리 아저씨의 행동은 그녀를 대등하게 바라본 행동이 아니었다. 철저히 관리자 혹은 상사의 입장으로 그녀를 ‘다루려고’ 했다. 만약 저비 도련님께서 주디에 대해 애정을 느끼고 그 관계에 진전을 원했다면, 그게 진심이었다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먼저였다. 물론 ‘저비’로서도 주디와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어 했고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으니 어려운 건 이해한다. 그렇다 해도 그건 올바르지 않은 시도였다. 한 치의 의문도 없이 깔끔한 결론이다. 그러나 결국,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도 일종의 신데렐라로 끝나는 것일까?      


내가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당당하게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그런 자신을 즐기고 행복을 중요시하는 주인공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의 신분과 후원자의 관계란 새로운 관계도 흥미로웠지만, 그녀의 매력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성공한 것이 그저 신데렐라 이야기의 현대 모습이어서라니. 애독자로서 심란하다. 제인 오스틴 소설을 한창 좋아할 때, 누군가의 ‘가난한 노처녀가 부자를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이야길 매우 싫어했다. 작가의 재주와 인물들의 매력이 단번에 반감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오스틴의 책을 꺼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는데 키다리 아저씨까지 그 사례에 들어갈 줄이야. 내가 너무 전통적인 신데렐라에 중독되어 있었던 걸까.    


갈수록 나를 세뇌하던 것들을 알아 감으로서 숨어 있던 편견을 깨는 건 좋은 일이다. 하나의 성장이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세뇌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었다는 건 슬프다. 내 소중한 옛 추억들이 모두 검게 물드는 것 같다. 내가 쌓아온 생각들이 세뇌 위에서 쌓아 왔다고 생각하니 모두 부질없이 느껴지는 건 너무 예민한 걸까? 분명 나만 느낀 경험은 아닐 테다. 내 유년기와 달리 지금은 아이들이 성차별도 고정관념도 없는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걸 이루기 위해 모든 이들이 신경을 기울이는 것도 당연하다! 너무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그런 일을 겪었으니 부디 내 인생의 후배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혹여라도 소중한 추억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며 슬퍼하지 않기를. 

추억이 예쁘게만 남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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