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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29. 2021

좋은 건 담아가면서

<교오양의 발견-이근철>을 읽고

“향기 없는 꽃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올 사람은 없을 테니 결국 오래 만날 사람은 나와 잘 맞는, 그럼으로써 행복감을 주는 사람이다.”      


친구라는 관계는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가족과 달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어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 그 선택이 항상 옳은 선택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선택의 대가는 크다! 친구는 곧 나를 보여준다는 말이 얼마나 유명한가. 자신이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자신이 변하는 걸, 사람들은 안다.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여덟 글자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한때 그 말에 의문을 가졌다. 사람이 반드시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지는 않는다는 걸 느껴서였을까? 내 친구 중엔 나와 분명 성향이 달랐지만 즐거운 사이가 많았다. 그런데 나와 내 친구 사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 원리를 파헤쳐 봤지만, 아쉽게도 답은 분명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 책에서 나온 문구는 설득력이 강했다. 그래, 서로 마냥 즐겁지 않아도 친구일 수는 있다. 하지만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향기 없는 꽃에 호기심을 느끼진 않을 테니까. ‘이 저자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말한다’라고 먼저 읽은 엄마의 평이 있었다. 그 한 마디가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인상 깊었던 구절들로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완성해본다.      


“분노는 무딘 자들을 재치 있게 만들어주지만, 가난 속에 가둬두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 말은 분노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말이다. 분노는 분명 목적을 이루거나 어떤 성취를 이룰 때 도움이 되는 불길이지만 그 안에 갇히게 만드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에는 원한과 복수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가장 공감되면서도 화려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한 번쯤은 악연에게 복수하는 꿈을 꾸지 않던가.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아니 대학생 초반에만 해도 복수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수많은 복수극을 보면서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복수는 ‘자신을 불태우는 길’이라는 거다.      

물론 내가 할 복수가 그들처럼 살인이나 치정 같은 무거운 복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사연이든, 이유든, 어떤 자세로 임하든 복수를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탈함을 느꼈다. 그 모습은 복수의 성공한, 흔히 말하는 사이다 장면보다 잘 와 닿았다. 복수했다고 다 끝난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런 게 인생일까? 정말로? 조금만 생각해 보자. 어제 맑았던 하늘이 오늘 우중충할 수도 있고, 그 하늘이 다신 안 올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은 행운이 문득 올 때도 있다는 말은 누구나 공감한다.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상과 사람이 맞물려 나온 그 미래를 어떻게 안다는 거야? 누구도 인생은 알 수가 없는데! 여기서 답이 나왔다. 어떻게 분노를 해소했다고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풍요로워질까. 설사 자신의 끝을 위해 복수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분노로 저지른 일들은 되짚어보면 부끄럽고 안타까운 것이 대부분이다. 애가 끓고 정당한 분노여도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 그 순간 답답하여도 분노에 갇히지는 말아야 한다. 분노에 갇히는 순간 그 사람은 죄수가 되고 말 테니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발언도 오늘날에 통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대로 마음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다. 물어보고 확인해야 할 대상이지. 만약 스스로 자신을 다스린다면 누굴 못 이길까! 생각해 보라. 많은 현자와 왕들의 스승은 늘 침착한 태도였다고 서술되곤 한다. ‘어른스러운 태도’도 침착하고 주위를 살피는 태도의 다른 말로 쓰이듯이 말이다. 사람이 침착하려면 기본적으로 평온해야 한다. 자신을 제어하고 다스릴 줄 알아야 그런 태도가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침착한 사람은 어딜 가든 눈에 띈다.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침착한 태도는 조용한 것과 다르고 냉정한 것과도 다르다. 상황 판단을 하며 최적의 상황을 찾아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일이고 평생의 과업이지만 나 자신이 가능할지 조금 막막하기도 한 일이다.     


“신념(믿음)이란 우리의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는 불빛이 아니라, 밤에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여정을 충분히 밝혀주는 등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말은 제일 가슴에 와 닿고, 제일 인상 깊은 명언이었다. 한 신념을 가지고 활동하다 그 신념이 꺾이는 순간이 오면 가장 쓸모없다고 버려지기 때문일까?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멋있고 그런 기둥이 하나 있으면 인생에서 덜 휘둘릴 것 같아 좌우명을 만든 적이 있다. ‘후회하지 말자.’ 그러나 흐릿하게 잊히고, 무언가의 일로 신념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덮은 좌우명이다. 그래서 신념은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는 빛이 아니라 등불이란 말에 눈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신념은 홀로 움직일 수 없다. 결국, 신념에 의해 행동하는 건 사람이고 신념만으론 허상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왜 신념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많이들 믿었을까! 사람들이 연설을,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의문을 대신 풀어주고 그에 대한 응답을 얘기해주기 때문이다. 종교에 독실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본받고자 하는 문구.

“언젠가, 어느 곳에서-그 어떤 곳이든, 틀림없이 본인 스스로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지 그때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거나 아니면 가장 쓰디쓴 시간일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 나에겐 낯선 이 시인의 말은 묵직하게 치닫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리 도망쳐도 죄책감에선 벗어날 수 없듯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 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은 기대되기도 무섭기도 한 일인데, 그걸 꼬집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내가 이기적인 면모가 있고 눈치 없다는 것을 꽤 늦게 알았다. 그리고 그걸 외면하기도 했다. 일부러 착한 척, 얌전한 척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점점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를 인지하고 가능하면 배려하려 노력했다. 나는 내가 옛날보다 덜 이기적이고 눈치가 생겼다고 자신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성장했다고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내가 성장을 자랑스러워하는 점에서) 그래도, 나는 이제 나 자신을 마주하면 기쁜 감정이 더 많을 것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정말 많은 명언과 활자 속에서 살아간다. 그건 위인이거나, 연예인이거나, 정치인이거나, 종교인의 말일 때도 있다. 그 사이에서 너무 짓눌리지 말고 가슴에 닿는 구절을 골라서 때때로 꺼내 보는 게 어떨까.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얼마나 좋고 현명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굳이 다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까. 조급해하지 말고 좋은 걸 담고, 받기 어려운 건 흘리며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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