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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Feb 02. 2021

님아, 그 시선 두지 마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감상하고

오, 신이시여. 도대체 누가 홍보 문구를 영화도 안 보고 쓰는지 모르겠다.

색감이 예쁘지만 슬픈 이야기라는 직감이 와서 쳐다도 보지 않은 영화였는데.

마지막 장면의 대사가 너무 궁금해 보고 나서 미칠 듯한 여운에 잠기게 되었다.  

   

‘사람이 원칙과 질서를 따르고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운이었음을 알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알고 난 후 마음 편하게 비난하거나 나무랄 수 없게 되었다. 그건 정말 편협한 시각이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양친 모두 살아 있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으며, 누군가에게 이유 모를 비난이나 폭행을 장기적으로 당한 적도 없다. 마냥 안전하고 순탄하게 살아왔다고도 볼 수 있다. 그 길이 마냥 무지갯빛 꽃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길에서 돌부리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원칙과 질서가 울타리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내 삶은 평생 원칙과 질서 안에 자리했다. 이건 자각하지 못했지만, 쉽지 않은 행운이었다. 많은 아이가 당연하게 누려야 할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도 그중 하나였다. 그 아이에게 원칙과 질서는 이해할 수 없고, 행복을 방해하는 돌부리일 뿐이다. 거추장스러운 겉보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니는 못된 아이다. 결코, 착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늘 쾌활하고, 활동적이다. 무언가 즐길 거리를 늘 찾는다.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개구쟁이, 어른들을 방해하지만 거칠게 막을 수만은 없는 아이. 솔직히 안쓰럽다. 하지만 저 아일 안쓰러워할 자격이 내게 있는 걸까? 내가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특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내가 감히 무니를 동정해도, 안타까워해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영화 감상 내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에게 자격이 있는가?     


핼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떤 점에서는 나태했고, 어떤 점에선 철이 없고 지나치게 거칠었고, 무례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무니를 사랑했고, 유쾌했으며, 당당했다. 그래서 그 자존심이 무너지면 그녀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타투는 화려했고 불량스러워 보였지만 아름답기도 했다. 사실 너무 어리고 젊은 여성의 모습이라서 더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엄마의 자격이 그녀에게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어린 나이에 친척이나 부모님도 없이 아이가 생겼다면 그 아일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어느 연예인이 말했다. 자신이 입양한 아이가 버려진 아이란 소릴 들었다고 울며 온 적이 있다고. 그 사람은 당당하게 말했다.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친부모가 사정으로 키울 수 없었으나 아이를 지켜내 다른 가정을 찾아준 것이라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키우지 못할 거라는 걸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제적,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하는 사람은 과연 다수일까?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삶이 뿌리째 흔들릴 정도의 절망을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감히 판단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함께 비를 맞으며 유쾌하게 장난치고 깔깔대는 핼리와 무니의 모습이 유독 잔상으로 남는 건 그들의 모습이 통상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사랑으로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아빠들은 어디 있을까? 스파디, 무니, 젠시의 아빠는? 그들의 엄마, 할머니는 아이의 곁에서 살아가고 온몸을 바치고 있는데 어디에 있길래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걸 왜 관람자인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걸까. 그것이 너무 소름 끼쳤다. 심지어 도중에 핼리는 티켓을 훔쳐 되파는데, 도둑맞은 남성은 당당하게 핼리를 찾아와 따진다. 그 남자는 성매매를 위해 핼리에게 왔고, 보비의 말처럼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 상황에서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핼리를 비난하고 남자를 피해자로 봤을까. 남자는 결코, 절대, 떳떳한 사람이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다. 둘 다 잘못했음에도 핼리에게 먼저 시선이 간 것은 그전의 핼리의 행동으로 선입견이 쓰였기 때문일까.      


흔적을 찾기 어려운 아버지와 달리, 극 중 가장 고난을 겪는 것은 핼리와 무니다. 세상 전부를 잃을 수도 있는 둘의 모습은 석양을 배경으로도, 보랏빛 모텔을 배경으로도 서럽게 예쁘다. 그러나 아마 관람자가 가장 공감할 사람은 매니저 보비였으리라. 동정과 외면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 그러나 제삼자가 보기엔 정말 좋은 사람. 미처 외면하지 못하는 비극에 도움을 주려고도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일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니까. 안쓰럽고 공감이 되면서도 동경하게 된다. 제삼자의 관점에서 함부로 돕거나 동정하는 것은 힘들 텐데도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 나가는 모습이 멋지고 고단해 보였다.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같았던 이야기. 그게 플로리다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만나고, 보는 사람들. 그들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얼마나 어려운지. 그 시선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혹여 아직도 소외된 사람들을 편견에 갇힌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하며 한 마디를 하고 싶다.

님아, 그 시선 두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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