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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Feb 16. 2021

폭력의 대가는 지극히 당연하다

폭력에 대하여. 모든 피해자가 고통을 해소하고 가해자는 죗값을 치르길 

폭력이란 글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많이 보이기 시작했을까. 어느샌가 보니, 뉴스의 헤드라인은 전부 폭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성폭력…. 그 배경도 가지각색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회사 내에서, 가정 내에서. 피해자는 어리기도 했고, 성인이기도 했고,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했다. 그 모든 폭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란 없었다. 남자라고 안전하지 않았고 성인이라고 괜찮은 건 아니었다. 늘 평화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안 보일 뿐.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예전에 비하면 아주 괜찮아진 거라고 할 수도 있다. 그야 굶는 사람이나 완전한 날것의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과연 괜찮아진 것일까? 오늘날 폭력이 이토록 많아진 걸 그렇게 치부할 수 있는가. 예전보다 덜하다는 이유로 덮는다면 그 문제는 평생 곪아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본다 해도, 고쳐야 하는 건 고쳐야 하는 법이다. 자신의 이익만 따진다면 세상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누리는 것의 배경만 생각해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순 없을 테다. 이기적인 태도만을 취한다면 결국 아무도 생존할 수 없다. 많이들 잊고 사는데,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돈이 많다 해도 사람이 없다면 미쳐간다. 돈이 다 된다고, 행복을 돈으로 못 사는 건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단 그건 모두 사람이 있을 때의 전제 하이다. 텅 빈 백화점과 상점에 몇천억과 함께 사람을 둔다면, 과연 행복할까? 버틴다 하더라도 그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리라. 사람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게 인간이 진화하고, 온갖 동물과 식물에 맞설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살아온 게 우리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위하는 쪽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누군가는 너무 예민한 게 아니냐고 한다. 예민하다니, 이 말이 언제부터 이런 데 쓰이는 말이었나. 지나치게 깐깐하다는 의미를 문제 상황에 써야 하는가? 사람이 다치고 피해를 보는 데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 피해가 부당한 것이라면 더더욱! 미성숙한 아이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맞설 수 있을까? 힘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휘둘리는 게 정상적인가?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고립시키는 건 또 어떤가. 모든 폭력은 처벌받고 금지되어야 하는 행동이다. 많다고 경시되어선 안 된다. 자신이 겪는 일이 아니라고 넘어가서도 안 된다. 어느 누가 폭력을 당해도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나. 다 귀한 사람이고 생명이다. 상대를 깎아내리고 싶어서, 자신의 분을 상대에게 분출할 수가 없어서, 그저 만만해서 폭력은 일어난다. 폭력의 원인은 간단한데, 그 결과는 절대로 단순하지 않다. 한 인생이 망가지고, 고통스러워지고, 그 흔적에 괴로워진다. 남의 인생이니 상관없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사람인가. 옛 조상들 말마따나, 금수도 그렇게는 안 한다. 당할 만해서 당한단 소리는 가해자들이 지어낸 핑곗거리다. 그럼 처지를 바꿔 본인들도 폭력을 당해보라고 해라. 폭력을 가했으면 당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나. 꼭 가해자들이 자신은 떳떳하다,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건 본인들에게 그 죄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쟬 괴롭혀도, 때려도, 괴롭게 해도 나는 안전하다.’ 쟤는 그럴 힘이 없으니까. 내가 한 줄 모르니까. 내가 했다고 말 못 할 테니까. 혹은 쟤가 고소하건 뭘 하건 무마시킬 수 있으니까. 사람이 참 잔인하고 모질다. 이런 생각이 나오는 배경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예민하다 할 수 있을까?     

 

유명인들의 학교폭력 문제가 요즘 심심치 않게 튀어나온다. 아이가 학대로 다치고 죽어 나간 가정폭력도 끝이 없다. 세상에 평생 잠든 문제란 없다. 그 옛날 저질러진 학살과 납치, 폭력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났다. 가해자들은 그걸 가벼이 여기고 잊지만, 피해자들은 잊지 못한다. 감히 잊을 수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고도 잘못을 모르는 자들이 있으니까! 피해자에게 망각하라 하는 사람도 있다. 기억해봤자 자신만 힘들 뿐이라고. 그렇다면 정당한 벌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두어야 하나? 그게 옳은 일이라고 보는가? 언젠가 벌을 받을 거라는 건 얼마나 모호하고 무의미한 말인가. 피해자들의 고통이 드러나고 고발이 나오는 건 복수가 아니다. 그들의 죗값을 치르는 일에 불과하다. 그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필요 없다. 자기가 저지른 과오에 자신의 앞길이 잡히는 건데, 왜 가엾이 여겨야 하는가? 감히 말하건대 그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뉘우칠까? 드러나지 않았다면 평생 밝히지 않았을 테다.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말이다. 사람이 모두 귀하다지만 죄를 저지르고 죗값도 치르지 않은 채 산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가? 죄인을 마냥 귀하게 보면 피해자가 뭐가 되냔 말이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게 한 자,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폭력은 그 정도가 다양하기에 누명을 쓰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조사하면 밝혀지지 않는 건 없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참사를 배경으로 나온 구절이지만 모든 비극과 폭력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폭력은 용서되는 일이 아니다. 

그 무거움을 알고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폭력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은 귀하다.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어떤 죄를, 잘못을 저질렀어도 봐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생명을 괴롭게 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폭력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일이다. 

모든 피해자가 억울함과 고통을 해소하고, 모든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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