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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Feb 17. 2021

불편한 표현, "문학소녀"

문학소녀는 왜 그토록 불편했을까


책을 읽는 건 정말 재미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소설, 에세이, 동화, 어떤 장르든 그 장르만의 개성이 빛난다. 모든 사람이 책이 최고라고 하진 않겠지만, 책의 매력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소녀’라는 표현은 어딘지 불쾌하다. 마냥 좋지 않다. 어째서일까? 말 자체는 굉장히 단순한 의미다. 문학이 바로 소녀와 붙었으니, 책을 좋아하는 소녀란 소리다. 그것만 생각하면 불쾌할 이유가 없다. 책을 좋아하는 건 그저 개인의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니 되려 칭찬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책을 좋아하고 잘 이해하고 많이 읽는 아이로 들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왜 문학소녀란 단어가 이리도 불편한 걸까?     


아마 문학소녀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주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화기 시대, ‘문학소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가 더 많이 생겼고 교육의 기회가 잦아졌다. 배움에 한이 맺힌 부모는 앞다투면서, 되는 데로 학교를 보냈다. 세상이 변했다지만 아직도 글공부는 출세하는 방법이었다. 가르칠 수만 있다면 가르치는 게 나았다. 어머니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학교가 생기자 여학생들에 대한 로망과 희망이 샘솟았다. 남학생들처럼 학교에 보내는 게 꿈이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소녀들은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 얼마나 많은 환호성이 하늘을 덮었을지 모른다. 바느질보다 책을 좋아하는 소녀도 당연히 있었을 테니까. 신세계가 열린 듯한 기쁨에 밤을 새워 읽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문학소녀는 세상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문학소녀는 소년들과 달리 환영받을 수 없었다. 세상이 아직 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든 원인이었다.    

 

여성이 책을 읽은 건 오래된 일이다. 아무리 남성 위주의 사회였다고 하나 지배층은 글을 익히게 하는 것이 소양이었다. 기녀들도 비록 천한 신분이었으나 글을 배우고 솜씨를 뽐냈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등 많은 여인이 글을 알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여인이 그녀들일 뿐 분명 많은 여인이 책을 읽고 시를 썼을 테다. 한글이 나오면서 책은 더 인기를 얻었다. 독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여성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진 않았다. 여성은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에 남성들에게 교육이, 책이 장려된 이유는 하나다. 먹고살기 위해서. 과거에 붙고, 관리가 되어 봉록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럼 배를 곯지 않고 풍요롭게 살 수 있었고, 승진하면 가문이 명문이 될 수도 있었다. 개인의 신념과 사상 이전에,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부모와 어른의 기대 덕분이었다. 가문의 영광과 부, 개인의 성장과 명예가 한 길로 통했다. 누구도 이 길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걸 반대한다면 딱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집이 가난해 그럴 여유가 없거나, 공부하는 아이가 여자라서. 공부해봤자 살림에도 영광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개인은 성장하고 지혜로워졌겠지만, 그뿐이었다. 이득이 없었다! 그게 경제적인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높이는 일도 아니었다. 반면 길쌈이나 바느질은 당장 살림에 도움이 되었다. 옷을 짓고, 삯바느질로 돈을 벌 수도 있고, 수가 뛰어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그때는 여자들에게 주어진 방법이었다. 먹고살고 돈을 벌고 명예를 가지는 방법. 남자들에겐 글이, 여자들에겐 바느질이 주어졌기에, 문학소녀는 주어진 길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더군다나 책을 읽으면 그 세상은 얼마나 황홀한가. 오늘날 현실이 싫어 인터넷 세상 속으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땐 책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워 눈이 뜨이고 현실이 보인다. 세상은 여성들에게 그리 편안하지 않다. 자신이 배운 걸 써먹고 자랑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고 했다간 혼나기 일쑤고, 혼삿길도 막힌다고 으름장을 받는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낙은 소설을 읽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여자아이가 학교를 갔다 와선 부모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고 한다면 곱게 보였을까? 거기다 일하거나 바느질 대신에 책만 보고 있다면? 좋게 보기 힘들었을 테다. 권위에 반항하고, 존경도 안 하고, 쓸데없이 ‘배운 것만 많아서’ 눈도 높아졌다고 봤으리라. 문학소녀란 말은 이때부터 보였다. 좋은 의미일 수도 있었겠지만, 자연히 비꼬는 의미도 담겼을 것이다. 현실을 보지 않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책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 당시 표현으로 하면, 좋은 신붓감, 며느릿감은 아니었겠다. 

   

답답한 시대였다. 그때를 버틴 여성들이 너무 대단해 보인다. 어쨌거나 본인들이 힘들었어도 문학소녀, 책을 읽는 여성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녀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온 것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 인식은 오랜 시간 변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 옛날에야, 위아래가 너무나도 확실한 제도 속에 있어 여성을 핍박한 거라 치자. 현대에 그럴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능력이 뛰어나면 성별은 상관없다. 어차피 남자만, 여자만 있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의 존속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같이 돕고 공유하며 살아야 하는 것,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지. 서로 존중하고, 대우할 건 대우해주고,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고.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러다 보면 문학소녀도 어느새 나쁜 의미는 산화할지도 모른다. 좋은 의미만 곱게 결정으로 남을지도.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서 특별히 책을 좋아하는 소녀들을 이르는 말로 말이다. 

그런 문학소녀라면,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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