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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03. 2021

내 유품은 마음대로, 뜻대로 하세요

유언장, 그리고 유품에 대하여

어린아이는 스펀지와 같다고들 한다. 주변에 있는 걸 모두 흡수하는 모습이 똑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는 부모의 모습도, 본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책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나 역시 그 시기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책의 영향은 훨씬 오랫동안 내게 맴돌았다. 활자의 세계는 서서히 스며들곤 했다. 앤이 실수로 만들었던 ‘레이어 케이크’가 내겐 가장 먹고 싶은 케이크였다. 주디 덕분에 대학이라면 기숙사를 가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세라의 타조 깃털 달린 모피 코트는 제일의 옷이었고, 메리와 콜린이 먹은 롤빵은 무엇보다 윤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는 케이크의 종류도 더 알고, 대학의 기숙사도 경험했다. 롤빵도 모피 코트도 다 이제는 상상 속의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의 그 환상 속, 그 소소한 사물들의 인상은 여전히 또렷한 아름다움을 빛낸다. 그만큼 활자의 흔적은 내게 강렬하다.     


반드시 물건에만 흔적이 화려하게 남은 건 아니다. 행동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릴 때 본 어느 만화책의 여자아이는 손톱을 물어뜯곤 했다. 그 모습은 질투가 나거나 불안해할 때 나왔지만,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는데, 어느샌가 따라 하고 있었다! 그 버릇은 아직도 남아 골치다. 그렇지만 아예 시도에서 막힌 행동도 있었다. 바로 <작은 아씨들>에 나온 에이미의 행동이었다. 나는 철이 없고, 오만한 모습이어서 에이미를 가장 싫어했다. 현실적이고, 보살피기 좋아하며 예쁜 메기나 당당하고 기운차고, 재주 많은 조나, 따스하고 착한 베스가 훨씬 마음에 들어왔으니까. 사실 대부분의 독자가 에이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곤 하지만…. ‘마치 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완 다르다. 그 어린 숙녀는 충분히 성장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고, 실제로 성장했으니까. 베스의 병 때문에 홀로 대고모 댁에 가 있을 때, 에이미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그 과정에서 어리고, 막내인 탓에 보이지 가려졌던 그녀의 심성이 보인다.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이 있지만, 타인을 수긍할 줄 아는 아이는 언니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면서 유언장을 작성한다. 자신이 죽으면 무엇을 어떤 언니에게 주고, 무엇을 어머니와 한나에게 줄 것인지. 아이가 한 단계 성장하는 장면이자 가슴 아픈 죽음을 인지하고 대응하는 어른의 대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유언장이라는 울림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죽으면 읽힐 글. 함부로 할 수도 없고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닌 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유에 달렸으며, 내가 남기는 마지막 글. 솔직히, 이만큼 아이에게 멋있어 보이는 글이 있으랴! 어떤 식으로든 유언장을 남기고 싶고, 써보고 싶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슨 말을 남길까, 누구에게 적을까. 온갖 생각이 가슴 안에서 맴돌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부푼 가슴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바람이 빠지고 말았지만…. 당황스러웠었다. 에이미는 유언장을 잘 써 내려갔는데 왜 나는 쓸 수 없었냐고 묻는다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남기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절대 삶에 미련이 없다거나 인생이 싫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읽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초등학생은 교복도 입어보고 싶었고 디저트도 많이 먹어보고 싶었다. 물건에 대한 욕심도 그득했다. 그런데도 왜 남길 물건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였다. 그냥, 내가 가진 것 중에 남기거나, 전달할 만한 게 없었을 뿐. 그건 정말이지 새롭고 거대한 충격이었다.


누가 본다면 이렇게 맞받아칠지도 모른다. 고작해야 13살의 아이가 그럴 물건이 있겠느냐고! 기껏해야 장난감이나 액세서리 따위 아니겠냐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뭘 그렇게 풀어내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의미’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였다. 유적과 별자리, 보석, 꽃에 얽힌 신화와 뒷이야기에 열광하는 사람이었단 말이다. 어린아이의 그런 환호는 가벼운 게 아니다. 그 당시에 느낀 매력과 재미는 평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런 시기에 의미에 빠져있었으니, 얼마나 물건에다 의미와 상징을 붙였겠는가. 어디선가 받은 플라스틱 모형 케이크의 이름은 ‘레이어 케이크’였고, 드물었던 양장 책은 가보와도 같았다. 날씨가 조금만 안 좋아도 괜히 불길한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하기 일쑤였다. 언제나 날씨가 심상치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라, 나는 그럴 때 불길한 예측을 하곤 했다. 그러니, 그런 아이였으니, 소중한 물건이 떠오르지 않는 게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 당혹감은 내가 ‘유언장’이라는 세 글자 아래 아무 시작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새하얀 백지는 그렇게 남았다.     


이상하게도 그건 고등학교 때라고 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으니 유언장을 쓰면서 감성에 젖고, 물건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집중했는데도 그러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며 남길 물건이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참….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지만, ‘무조건’ 남길 물건은 여전히 없다. 지금의 내가 유언장에 쓸 물건은, 간직해주길 바라는 물건은 내가 그린 그림 몇 점하고 써 온 글의 데이터 정도일까. 이모가 어릴 때 선물한 인형이랑, 사진? 뭔가 내가 떠났을 때 반드시 태워주길 바라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만은 안 된다고 할만한 것도 없다. 내 물건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꼭 줬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 준다고 기뻐하거나 소중히 할 것 같지도 않고, 사람에게 한계가 있으니까. 내가 물욕이 없는 미니멀리즘을 사랑한다면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완벽히 어울리는 결론일 테지. 하지만 난 물욕이 넘쳐나는 사람이면 사람이지, 그 반대와는 거리가 멀다! 사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데, 왜 남길 만한 것도 주고 싶은 것도 없는 걸까.     


지금 당장 내 죽음과 그 이후의 처리를 생각해보아도 아쉬운 물건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내게 물건은 의미가 없나 보다. 예쁜 것도 반짝거리는 것도 감성적인 것도 다 좋은데, 죽으면 다 미련이 없을 것 같다. 저승에 가져가지도 않을 테고. 그냥 사는 동안 내가 누리고 싶을 때 누리면 그만이려나. 사람이 머무는 장소나 가진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취향, 행동, 성격이 반영되기 마련이니까. 어쩔 땐 사람 본인보다도 그런 데 자신이 잘 드러나곤 한다. 그게 내가 물건에 대한 애착과 미련이 적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는 세상에 ‘나’를 보여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다. 죽은 이후의 신화나 후일담, 달라진 대우와 평가가 무슨 소용인가. 당사자가 겪지 못하면 거기서 그만이다. 모두 남겨진 사람들의 위안과 포장일 뿐. 흔치 않은 죽음을 접한 자의 인생이 그렇게 끝난다면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끝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늘 곁에 두고 인지하는 것 역시도 아니지만…. 그래서 사람의 살아있는 인생은 뭐라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죽음 이후엔 그 무엇도 의미가 없으니까. 그 의미가 적용되고 소중한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타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내 죽음 역시 그렇게 보기 때문에 유품에 대한 계획이 무의미한 것 같다. 쓸모없다! 타인의 유품을 내가 정리하거나 받으면 물론 소중히 하겠지만, 내 죽음 이후엔 그마저도 어찌 될지 모른다. 만약 어른의 유품을 내가 가지게 된다면 그것만 거처를 좀 고민하지 싶다. 그 외에는, 태우든 팔든 버리든 남겨진 이들의 자유다. 소중하고 깊은 역사가 있다면 모를까. 떠나는 이가 남기는 물건에까지 섬세할 필요는 없다. 진정 기억되고 물려받는 건 사물이 아닌 기억과 생각이니까. 껍데기를 남기고 좋아할 고인이 있겠는가. 내 유언장엔 그렇게 쓰일 거다. 


내 유품은 모두 내 가족의 자유에. 혹은 남겨진 이들의 자유에 맡긴다. 

이따금 회고하여,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며.    

 

그걸로 좋은 마무리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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