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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04. 2021

내 생애 가장 영웅에 가까웠던 순간

영웅심리, 학창시절의 경험에 대하여

사람은 이따금, 아주 이상한 용기가 치솟는다. 때리는 사람에게 맞선다던가, 흉기를 휘두르는 행인을 제압한다던가, 혹은 가식적인 사람에게 대놓고 일침을 날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것도 아주 뜬금없게 나타나곤 한다. 위험 상황이 극단적일수록, 피해자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일수록 더 또렷해지기도 하고. 사실 그런 경우를 맞닥뜨리면 외면하는 게 보통이다. 신고하고 지켜보는 게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일 때도 많다. 마냥 피해자를 감싸주기엔 너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알 수 없는 그런 심리는 영웅 심리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비범한 재주나 뛰어난 용기로 ‘사람들 앞에서’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그 얄팍한 욕구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 있음에도,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인정받고 칭송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마련이니까. 어찌 보면 잔인하고, 어찌 보면 어리석다.     

 

나 역시도 ‘영웅 심리에 휘말린 것 같은’ 경험이 있다. 정말이지 내 인생에 다시없을 과감한 모습이었다. 무슨 용기로 나섰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까마득하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 내 행동은 부모님도 친구도 경악한 행동이었다. 내가 한 행동보다 내가 그 직후에 본 친구들의 모습이 더 생생하다고 말한다면 좀 느껴지려나?


사실 거창한 걸 한 건 아니다. 사소하다면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었다. 괴상하고 독특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저 말을 건넸을 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저녁을 먹고 반에 삼삼오오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 반 아이 중 한 명이 다른 반 아이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란했다. 친하지 않아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의 분위기에 예민해진 나머지 아이들은 하는 게 한정적이었다. 복도의 웅성거림은 갈수록 커졌다. 반 안에 앉은 아이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더는 무시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앉아있어 봤자 공부가 될 리 없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성적에 민감한 시기이지 않은가. 거기다 당시 우리 반은 나름대로 자습 분위기도 학업 분위기도 좋아 제법 우수했다. 반 아이들 사이에 트러블이 많지도 않았고 반장도 아주 유능해서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자습 도우미였다. 이쯤 되면 뒷이야기가 나온다. 자습 도우미, 너무 시끄러운 복도,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심리. 밖이 잘 보이는 반 뒷문에 모인 아이들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농담 반으로 튀어나온 그 한 마디가 나를 밀었다.   

   

“너 자습 도우미잖아, 나가서 뭐라고 해봐”     


그 말을 한 아이도 놀랐다. 모두가 놀랐다. 사실 한 번쯤 나올법한 말이었고, 무거운 말도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며 너나 나가라고 받아칠 수 있는 정도? 그러니 그 말은 그저 촉진제였을 뿐이다. 다른 아이였다면 나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맞았을지도 모르고. 다만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머리가 아주 갈팡질팡한 상태였다.      


‘어쩌지, 나가야 하나, 그렇지만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근데 시끄러운 건 사실이고 나는 그걸 지적할 수 있는데. 나름 명분이 있지 않나. 나가? 말아? 나가? 어떡해?’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이 들려왔으니! 단박에 문을 열고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문을 열고 밖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모인 아이 중 내가 아는 아이는 몇 되지 않아서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로 갔다. 굳은 얼굴로 뭐라 뭐라 하던 아이는 다행히 다가가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나는 지금 자습시간인데, 너무 시끄러우니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평범한 말이고 흔하게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저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였고 함부로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였을 뿐.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바로 수긍했다. 다른 데 가서 얘기하자며 아이들은 이동했고, 설마 바로 이렇게 변화할 줄 몰랐던 나는 얼떨떨했다. 여고에서 웅성거림은 아주 무섭고 모든 게 시작되는 시점이다. 온갖 신경이 몰리고 예민해지는 요소다. 그래서 몇 명만 모여 이야기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거기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조금만 사람이 뭉쳐 있어도 그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모여있던 무리를 흩트리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게 내 말로 이루어지다니, 현실감이 없는 게 당연했다!     


약간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하게 반에 오니, 나보다도 더 경악한 반응이 돌아왔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며 독촉당했다. 몸이 그렇게 격렬하게 흔들린 건 처음이었을 거다. 자습시간이라 방해된다고 소리를 줄여주거나 다른 데에서 얘기해 달라고 했다고 하니, 아이들은 다시 한번 기겁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공부 위주의 ‘범생이’가 할 만한 말이라고. 놀란 기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고의 예민한 특성을 알고 계시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실 정도였으니까. 다신 그러지 말라고 한 소리 듣기도 했다. 단순히 말 한마디 한 거고, 그리 이상한 상황도 아니지 않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등학교, 특히 여고의 심리를 모른다고 일갈하겠다. 자신의 펜을 건드리는 손길에 조금만 날카롭게 반응해도 바로 따돌림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괜히 학교폭력이 심각하게 대우되는 게 아니다. 정말 별 것 아닌 일로 모든 감정이 시작하고 지나친 비극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친구와 부모님의 반응이 별난 건 아니다. 나 역시도 긴장한 채 행동했으니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거고. 심하면 정말 큰 따돌림을 당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뭐, 정말 그 순간 나선 건 나조차도 마냥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야말로 영웅 심리를 제대로 경험했달까.     


학창 시절은 벌써 가물가물해지고 있지만, 강렬한 몇 가지는 여전하다. 아마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거나, 처음 느낀 건 쉬이 잊히지 않아서일 테다. 앞선 경험도 그 얼마 안 되는 기억 중 일부인데, 조금도 흐릿하지 않다.  신기한 일이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모든 시간을 기억할 수는 없다. 망각의 축복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잊음으로써 극복하고 나아가기도 하니까. 너무 많은 걸 기억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자폐아도 너무 많이 알아서 힘들어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이렇게 어떤 경험은 강하게 뿌리를 내린다. 살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반드시 좋은 기억만 남는 건 아니지만, 그런 기억이 남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흑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실수나 경험이다. 주로 스스로의 행동이나 발언이기에 다시는 하지 않길 바라는 경각심에서 남는 기억이 아닐까. 이번의 경험 같은 건 너무 강렬하기에 쾌감까지 느껴질 정도니, 어떤 점에선 위협이라고 인식해 비슷한 경우를 대비하여 남겨진 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론 그 시간이 내게 자신감을 부여해서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고….     


영웅 심리에 도취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정말 한순간에 끔찍한 학창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걸 했다. 하고자 하는 발언을 했고 원하는 결과도 얻었다. 상황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고, 긴장으로 가득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걸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 쉽게 할 수 없는 자신감의 경험이다. 물론 이 이상의 경험은 사양하고 싶을 지경이지만, 지금의 내 자신감의 원천이라 여전히 뿌듯하고 보람차다. 그때 힘들어했던 반 아이는 감정 정리가 더 쉬워졌고, 반 분위기도 담담해졌었다. 그게 무조건 좋았다곤 못해도,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확실히 나아졌기에. 나는 그 순간의 용기를 아직도 사랑한다.     


영웅 심리는 분명 부정적인 면도 있다. 그저 본인이 욕심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러다 더 큰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냥 나쁜 건 아니다. 그 행동으로 누군갈 구하거나 위안을 준다면, 사람이 성장하게 된다면,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인생의 진정한 보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어떤 일에 임하거나 행동할 때 너무 떤다면, 영웅 심리를 한번 고양해보길 추천한다. 

물론 남용하란 말이 아니다! 

너무 긴장되어 대처를 모르겠다면 과감한 영웅 심리를 새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누가 아는가? 그걸로 정말 영웅이 되는 시작이 열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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