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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06. 2021

그들은 그대로 있고
나만 홀로 달라져 있다

익숙해진 아름다움을 안타까워하며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전 세계를 뒤져봐도 손에 꼽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일 수도 있다. 그림 자체도, 그림이 있는 미술관도 그린 화가도 모두 유명하기론 최고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게, 좋아한단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 유명세 때문에 모나리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모나리자의 그 인기가 작품을 더 짓누른다고 생각한다. 인기와 광명, 후광이 존재를 빛낸다면 환영이다. 다만 무엇이든 과하면 반감을 사지 않던가.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모나리자를 더 돋보이게 해야 할 인기와 명성이 작품을 해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이 뜬금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부디 한 번쯤은 모나리자를 직접 보고 와주시길 바란다. 모든 작품은 실물을 볼 가치가 있다. 화소로 표현되는 얄팍한 화면이 아니라 그 작품이 있는 장소와 크기를 담는 존재를. 그림의 크기는, 그게 있는 위치는 아주 중요하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보면서 우리는 편의를 얻었다. 그 대신 그 자체로 지닌 분위기와 매력을 볼 기회를 잃었다. 그건 정말 큰 대가를 치른 거래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온라인에서 본 그림을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없어서다. 실물과 가상의 그림을 일일이 비교한다면, 어찌 실물에 가상을 비빌 수 있을까. 여우가 포도를 먹지 못하자 신 포도라고 비하했듯, 사람들 역시 실물을 다 보는 기회가 드무니 실물을 볼 필요 없다고 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본 그림을 실제로 봤을 때의 기분을 아시는지. 그 심정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조금 흐릿하고, 익숙한 색감과 달라도, 직접 보는 명작은 생생하다. 붓이 오간 손길과 걸린 자리와 그 주변의 자연광과 불빛까지…. 모든 그림은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또 어떤 그림은 천장에 있어야 했고, 어떤 그림은 아주 거대하게 걸려야 했다. 어쩔 땐 화려하고, 다른 땐 품위 넘치고, 어느 순간엔 세밀하면서 새로운 걸 요구받았다. 그걸 충족시키거나, 아예 그런 요구마저 넘어 역사에 남은 그림들이 우리가 보는 것들이다. 자연히 원래의 장소, 원래의 위치가 가장 어울릴 수밖에 없고 그곳에 있어야 본 의도를 느낄 수 있다.      


되새겨보라. 예수님, 하느님,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이 그려진 그림은 대부분 위에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들을 올려다보고, 그들은 우리를 굽어본다. 조각의 경우도 마찬가지. 사찰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하는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한다. 정면에서 봤을 때 졸린 듯한 눈은 절을 올리는 중생을 응시한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관계가 형성된다. 사람이 기대는 존재들은 위에 있고, 그로서 우리가 의지하며 떠받들게 된다. 반드시 종교적인 게 아니어도 그림의 위치는 그려진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천지창조 같은 그림이 바닥에 그려졌다면? 혹은 창문 옆에 자리한다면? 솔직히 상상만으로도 그 매력이 떨어진다. 그렇게 하늘 배경에 기원을 노래하는 그림은 천장화에 어울린다. 사람만이 자기 자리가 있는 게 아니다. 그림도 작품도 다 제 자리가 있다. 그제야 제대로 된 빛을 발하는 법 아니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물이 실망스러운 일도 있다. 그림이 거대하다면 실물이 더 매력적인 것은 당연하다. 손안에 들어오던 그림이 그 위엄을 뽐내며 끝없이 펼쳐지니까. 그 반대가 아쉬울 뿐이다. 우리가 본 그 크기 그대로 있다면 매력은 바로 추락한다. 모나리자도 그런 인식에서 피할 순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차라리 별로 알려지지 않은 그림이라면, 기대가 적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래, ‘기대’가 적다면! 하다못해 대중적이지 않다면 말이다! 모나리자는 전혀 그 선에 들어가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모습은 너무 또렷하다. 머리와 옷, 손의 자세, 눈빛과 입매까지. 그 분위기는 머릿속에 너무 확연히 각인되어 있어서, 실제로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모나리자를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마음조차 한 번에 무너지고 만다. 게다가, 그 이름 때문에 보기도 쉽지 않다. 에스컬레이터만 세 개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 길도 빠른 게 아니라 아주 명절 길 고속도로처럼 꽉꽉 막힌다. 계단이 있다면 그 계단을 홀로 오르는 게 더 끌릴 정도로! 넓디넓은 홀, 거대한 루벤스 그림 사이에 자리한 모나리자는 위험을 방지하고자 유리관 안에 갇혀있다. 홀 안에서도 줄을 서서 겨우겨우 관람이 가능한 상황에서, 그림의 감상이란, 얼마나 무의미한지. 한번 보고 지나가는 순간을 포착하기도 힘들다. 감정과 경험은 언제나 사물에 덧씌워지는 법. 유명한 명작이어도 그 법칙을 피하진 못한다.     


은은한 미소, 신비로운 모습의 대명사. 아들을 잃은 슬픔의 귀부인이자 묘령의 여인.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여인이 반갑지 않은 게 슬프다. 그건 지나친 인기의 탓일까, 아니면 그 가치로 인한 경계 때문일까, 혹은 그 실물에 대한 실망 때문일까. 세상엔 많은 모나리자가 있다. 그들은 연예인일 수도 있고, 귀중한 유물이거나 자료일 수도 있다. 혹은 책이거나 영화일 수도 있다. 그들의 가치는 변한 게 없건만, 이상하게도 직접 보거나 경험하는 순간 빛을 잃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흔한 경험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다. 반드시 통하는 법칙은 아니지만, 사람은 어느 한 가지에 익숙해지면 그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는 걸까?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고 되새기는 것만이 가치를 유지하는 방법인 걸까.      


모든 것은 아름답다. 저마다 그 가치가 있다.

세상의 모든 모나리자가 언제나 눈부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또 어느 순간엔 내 가슴에 모나리자가 다시 자리 잡길.

그 아름다움을, 매력에 다시 공명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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