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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04. 2021

언뜻 보면 아름다울 신분제 시대

드라마 <녹비홍수>를 보고

요즘은 사람들이 신분제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웹툰, 웹소설,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빙의, 회귀, 환생 등 다양한 방도로 신분제로 떠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걸 보라. 혹자는 이런 유행이 오래가는 이유가 사람들이 지쳐서라고 한다. 모두가 평등한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공부와 학습이 필수인데, 이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그 반대를 원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걸 벗어날 수 없고, 제 자리만 지키면 되는 그런 생활을 말이다. 적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 더군다나 운만 잘 타고나면 평생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인생이니 그렇게 다들 악녀니, 폭군이니, 황녀니 하면서 집권층의 일생을 부러워한다. 이 생각은 당연히도 얕은 생각이다. 신분제가 있을 때는 사람들 대부분이 하층민이었고 고달픈 삶을 살지 않았나. 결국, 꿈에 불과하지만, 그 시대 배경을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는 못 할 것이다. 그런 시대를 잘 보여준 드라마가 있다.     


<지부지부응시녹비홍수>(이하 녹비홍수)는 송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한 서녀의 이야기이다. 소설 이름은 <서녀명란전>이라고 할 정도로 서녀의 모습과 처지를 잘 드러낸다. 세 번째 부인이자 두 번째 첩인 어머니는 다른 첩의 모함으로 일찍 죽고, 어린 명란은 할머니의 손에 커 어머니의 복수도 하고, 살기 위해 온갖 모략을 물리친다. 갓 결혼한 다음 날, 시댁 식구들이 첩을 들이미는가 하면 키워준 할머니가 독살당할 뻔하고 남편의 옛 첩을 정리하는 과정은 참 만만치 않다. 친구의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칼을 빼 들고, 끝없는 인내심과 두뇌로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는 모습은 경탄이 나오지만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 드라마는 서출임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거나 탄탄대로를 걸은 그런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 주인공 명란은 사랑받지 못한 어머니처럼 사랑받지 못했고, 편애에 지쳐 아버지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 그 교훈을 자신의 부부관계에도 가져와 남편에 대한 기대가 없어 남편이 서운해할 정도다. 명란은 어릴 적 숯이 없어 추위에 떨었고 재주도 선보일 수 없었다. 똑똑하거나 눈에 띄면 안 됐다. 그러면 바로 견제가 들어와 고달파질 테니까. 칭찬받고 싶은 욕구, 더 좋은 걸 가지고 싶은 욕구 모두 버리고 몸을 낮춰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안에서 가장 사랑받은 자식은 다른 첩의 딸인 묵란이었는데, 정말 여우 같은 면모로 모든 총애와 물건을 가로채며 살아 나중에는 저 스스로 화를 불러온다. 아무리 아픈 손가락이 따로 있다지만 가정에서의 위치가 혼사로도 이어지는 그 시대에 그런 편애는 정말 있어서는 안 됐다. 더군다나 정실의 자식이라면 적녀, 적자라는 신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서녀는 그조차도 없지 않은가. 정실이 사랑받고 힘이 있어 집안을 다스렸다면 첩을 공평히 대하기라도 했겠지만, 첩이 모든 총애를 받으니 집안의 모든 아이는 평생 첩을 견제하며 사는 방식을 택했다. 집안의 균형이 맞지 않고, 정실의 위엄이 안 서 원한이 쌓였다. 종국에는 그 원한이 제 주인을 찾아가 첩과 첩의 딸은 파국을 맞이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서도 분이 과연 다 풀렸을지 의문스럽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요즘의 편애도, 과거의 편애도 정말 잔인하다고 느꼈다. 단순히 더 예쁜 자식을 더 아끼는 수준이 아니라 단 한 명의 편만 드는 것은 원한을 사는 법이니까. 물론 부모로서 자격이 없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람의 자존감을 깎아 먹고 평생에 영향을 주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과거의 편애가 더 위험한 건 분명하다. 오늘날과 달리 가정이 모든 사회에서 중심이 되어 일생을 좌지우지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다른 대우를 받을 기회를 거의 차단해 버리니 말이다. 또 이 편애는 어머니를 따르게 되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특히 ‘어머니의 유무’가 주는 차이가 잘 보였다. 아무리 서녀라 해도 딸이 시집갈 때까지 지켜보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어린 자식을 두고 죽어 아무런 도움도 못 준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자식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고 자식이 그걸 의지했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없는 자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속을 다스리거나 울분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혼사와 집안 재산 분배 모두 대우가 얼마나 깎이는지 모른다. 그 차이는 정말 무서울 정도다. 

    

더군다나 저 시대상에서 ‘가족’이란 틀은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가족은 운명공동체로 한 명이 화를 당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들 화를 입었다. 시집간 딸은 무시를 받고, 시집 안 간 딸은 혼사도 안 들어오고, 아들들은 벼슬길이 막히는 식으로. 억울하게도 그렇다고 서로 잘 살뜰하게 챙겨주는 것도 아니면서 체면을 차리게 되는 것이다. ‘가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가’라는 사상은 일리가 있지만, 가족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자식의 경우 태어나 보니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절대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부조리를 견딜 수 있을까? 이 사상이 사라진 것에 대해 많은 감사를 표한다. 이 사상이 계속되었다면 체면을 위해 사람들은 양심도 정도 다 버렸을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알려지지만 않으면 그 안에서 학대를 하든, 편애하든, 협박을 받든 말든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나는 사극을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신분제를 동경해서가 아니다. 앞서 말한 아주 일부분의 요소만 가지고도 신분제에 대한 격분을 토론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신분제 사회에서 나타나는 갈등이 유구히 비슷하고도 다르고, 역사를 흥미롭게 알 수 있으며, 고대 특유의 정취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이 화가 난다고 단향을 피우지 않고, 자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듯, 사극에서만 느끼는 서정은 그 나름의 멋이 곱다. 부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신분제에 대한 동경을 계속하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켰으면 좋겠다. 굳이 환생이나 빙의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조금 더 그 시절에 대해 알아보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너무 흥을 깨는 짓일까?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왜 모든 나라가 신분제를 벗어던지고 현대사회의 틀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신분제를 가볍게 보는 인식이 사라질 것이다. 힘든 지금을 견뎌내는 데 도움이 될지라도 약간만 냉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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