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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04. 2021

부디 이제는 행복해지자

<나의 가해자들에게-씨리얼>을 읽고

제목을 보고 집어 이제 읽을 때가 되었다고 여겨서, 가져온 책이다. 

솔직히 가져와서도 외면해온 책이다. 그 내용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내용일지 알기 때문에 손을 대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무언가에 홀린 듯 두 번째 집어 든 순간,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나는 내 학창 시절에 대해 떠올리면,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겪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성장하기에 그만큼 성숙한 관계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지옥을 보여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던 순간 중 가장 괴로워 보이는 순간들은 역시 중, 고등학교 시절 괴롭힘이었다. 내가 어떤 내용을 알고 싶어서,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그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발전 혹은 성장을 위해서 보게 된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왕따라고 하는 것에 예민하고 사람 간의 관계에 눈치를 보고, 소외감을 경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아직도 내면에 한으로 맺혀 있다. 나는 아직도 가해자를 용서할 자신이 없다. 그들이 용서를 빌어도 용서하지 않는 건 내 권리이고 내 보상이니까. 이런 나에게 친구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해주었더랬다. 같이 욕을 해주며 천벌이나 받으라고 하거나, 그런 쓰레기들 신경 쓰는 게 지는 거라고 위로해주거나 너가 잘살고 있으니 복수한 것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서 그 일을 잊지 않는 게 속 좁아 보일까, 상기해봤자 의미가 없으니 무시하고 살아왔지만, 만약에라도 가해자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알아보는 즉시 싸대기를 날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큼 아직 맺힌 응어리가 많다는 것도. 그런 나를 알기에 언젠가 이런 것에 대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있었던 모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아, 읽을 때가 됐구나’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 무의식은 나에게 큰 도움을 선사했다. 사람의 감은 살아온 생애 동안 쌓아온 데이터에 기반을 둔다더니, 그 말을 절실히 깨달은 사건이었다. 묵혀온 상처의 흉터가 덧나는지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바른 로션에 그 흉터가 나아진 걸 느끼는 느낌?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왕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 한 칸이 서늘한 것은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내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사회성이 뛰어나다곤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단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이 사회성이 뛰어나건 아니건, 사람들과 안 맞건 아니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건 아니건, 피해자들은 피해 행위를 당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 이유가 따로 있겠느냐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 한창 성장하면서 배워나가는 그 시기에는 순수한 악의를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출하기 쉽다. 나이 들어서는 어릴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로 지나가기에 더욱 울분이 나고 비참해지는 것이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는 학창 시절의 상처다. 그러니 학창 시절에 아이들이 멋대로 상처 주고, 멋대로 거칠게 행동하고, 멋대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아니, 경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는 반드시 처벌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래야 교훈을 얻고 새로운 행동에 나서니까. 


하지만 잊지 말자. 왕따는 그저 범죄의 한 종류다. 사람의 자존감을 깎고 경제적인 피해부터 정신적,신체적 피해 모든 피해를 입히는 범죄 행위다. 그러니 왕따를 겪은 우리가 그토록 괴로움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시간은 멈추지 않기에 때로 고통을 그대로 선사하지만 결국에는 치유를 선사한다. 치유 이후에는 행복이 있다. 혹 지금도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고통이 영원하지 않음을 부디 명심해주길.      


그런 고통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당장 그 굴레를 끊고 싶다. 무엇이든 하고 싶다. 하지만 모두 알 것이다. 사회적으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아주 소수의 사례에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 모두가 그 문제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한다. 별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도 수긍한다. 하지만 제도가 필요하고 문제 해결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잠자코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험한 사람들은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단지 방도가 눈에 보이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우리의 바람처럼 하루빨리 이 문제가 없어지고 모든 학생이 웃는 나날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위해서 약자를 보호하는 태도를 보이려면, 그를 주장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위해 나서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고 하나의 주장이지만 약자가 약자를 위해 나서는 것은 주장으로도 취급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위로와 함께 깨달았다. 나는 행복해져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이는 내 평생에 긍지와 목표가 될 것이다. 모두 함께 이제는 행복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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