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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an 06. 2021

너무 많고 잦은 불행의 존재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네이딘 버크 해리스>를 읽고

나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 이입을 잘한다. 좋게 말하면 감수성이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다. 슬픈 장면이면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건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당연히도 드라마나 소설 속 인물들의 불행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불행이 어떤 결과가 되고 어떤 이야기가 될지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알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학대나 고통은 절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흔한 이웃의 이야기이다. 그 학대나 불행의 사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 인물이 겪은 불행과 그 이후의 건강을 연관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모든 불행은 심리치료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은 인상이기 때문이다. 심하면 시간이 해결해주니 대처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걸 무의식중에 자각했는지,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집어 오게 되었다.      


책은 의학 전문 내용이 함께하기에 어려웠지만 놀랍고 흥미로웠다. 사람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영향을 끼치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의학적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정적 아동기 경험(AC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이 스트레스 반응 체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후성유전적 변화와 텔로미어에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어린 시절은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기 마련인데, 그 당시에 얻는 충격을 제외하고도 저런 반응이 추가적이라면 끔찍한 일이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후성유전적 변화와 텔로미어의 변화를 안 이상, 우리는 환경과 유전을 떼어 이야기할 수 없고 의학과 심리학을 떼어 이야기할 수 없다. 이는 정말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아직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나타난다. 가슴 아픈 일이다. 부정적 아동기 경험을 하는 것 자체로도 힘든 일인데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의 몸에 나타나 모든 걸 앗아간다니. 그 점에 주목한 의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이렇게나마 적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 걱정과 궁금증이 있었다. 그 부정적 아동기 경험이 초등학교도 들어가나?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성인이 그 시절을 위로해야 할까? 할 수만 있다면 활자 사이에 들어가 묻고 싶었다.    

 

다만 이렇게 나 자신과 고통에 대해 성찰하는 와중에도 내용이 온전히 들어오지는 않았다. 문화 차이 때문에, 혹은 환경의 차이 때문에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ADHD 판정으로 온 아이들이 그토록 많아 의사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꺼림칙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그 판정이 흔한 편이 아니라고 알고 있고, 오히려 성인 ADHD가 널리 퍼질 정도로 큰 상태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느낌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그렇게 판정을 받아 그걸 병원에 보낸다는 것이 조금 충격이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약물치료와 문제아 판정을 받는 건 아닌지…. 이 부분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주위에 어린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원래 자기 일이 아니면 함부로 속단해선 안 되니까. 하지만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너무 안타까웠다. 왜 소아의 질환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건지. 아이들이 염려 받는 게 왜 감기나 수두 따위가 아닌 정신적 스트레스가 된 건지. 제일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 아닌가.     


또한, 총기 난사 부분에 있어선 특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총기를 도대체 왜 그렇게 널리 보급해서 매년 수많은 사람이 공포에 떨게 한 건지 답답하다. 그 시대상과 배경을 보면 이해는 되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넘치는 혈기의 사람들이 총을 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 뒤에 총기 회사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지만 어쩌겠는가. 이어나갈 말이 없는 것을. 모든 나라에서 총기가 없어지는 건 꿈같은 몽상에 불과하지만, 매번 미국의 환경 문제가 거론될 때면 총기만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미국은 아동 보호 서비스가 있을 만큼 아동에 신경 쓰는 편인데. 왜 총기라는 큰 문제를 그토록 외면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건이 떠오르는 순간들이다. 의료계에서 언론에서 아무리 주장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들. 명백히 고쳐야 하는 것들이 안 고쳐지는 순간을 볼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고 온 손과 정신을 놓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나아간 의학의 찬탄을 느끼면서도 현실의 무력에 한층 답답하기도 했던 순간을 느낀 경험이었다.  너무 많은 불행이 선명하게 만연한데 그 존재를 어떻게 조치도 할 수 없나 싶어 막막했으니까.    


이런 사회적 문제는 쉬이 고칠 수 없다. 고착된 것도 고착된 것이거니와 무엇이든 바꾸려고 하면 힘들기 마련이다. 더군다나힘이나 권력이 없으면, 그 말의 무게는 가벼워진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이 늘 가혹하지만은 않아서, 작은 양심과 도덕이 한데 뭉치면 그 힘을 발휘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주장과 의견은 한 사람의 권위에 눌릴 수도 있겠지만 무의미하지 않다. 이제 세상은 반드시 승리자들의 세상이 아니라서 의견 자체로 존중을 받고 일종의 역사로 취급된다. 바꾸자, 하면 바뀌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가 얼마나 큰 차이던가? 적어도 불행이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아주 큰 차이를 초래한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없어져야 할 대상은 너무나 선명하다. 사회에 자리잡은 불행을 모두 뿌리 뽑을 수 없다면 적어도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는 그곳에서 보호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문제를 알고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부끄럼 없이 행동해보자. 어려운 일이니 한 발 한 발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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