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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18. 2021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변하더라고요

취향과 변화에 대하여

‘나이가 들면 먹게 된다.’ 이 말을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사람의 입맛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느냐는 호기가 가득했던 때다. 하기야 누가 알았을까. 채소라곤 김치나 나물 정도만 먹었던 내가 채소를 먹게 될 줄. 나조차도 내가 그럴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단 소리는 믿어도 사람 입맛이 바뀐단 소리는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정말 채소란 채소는 질색하는 아이였다. 어린이 입맛 그 자체! 단 것은 좋고 쓴 건 싫고 채소도 싫어했다. 부모님의 걱정이 가득했지만, 입맛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평생을 살 것만 같았다. 단 걸 좋아하고 건강한 걸 싫어하는 어른도 있었으니까. 나도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까, 홀로 짐작했었다.     


변화는 조용히 찾아왔다. 고기를 좋아해도 쌈은 잘 안 싸 먹었던 시절은 언제이었는지도 까마득하다. 고기를 먹을 때면 자연스레 파채를 찾았다. 파, 양파, 피망, 파프리카 다 안 먹던 시절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파채를 먹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놀랐던 기억은 우습게도 생생하다. 팽이버섯의 맛을 알고 온갖 요리에 팽이버섯을 넣어달라고 조르게 되기도 했다. 마라탕이든 고기볶음이든 찜닭이든 팽이버섯을 넣어 맛있게 먹었다. 고기만 골라 먹던 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본래 나물은 좀 먹는 편이었지만, 그 범위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나물 특유의 풋내를 경계한 게 언제였는지. 그 풋내가 생생한 유채도 이제는 잘 먹는다. 고기가 있어도 신기하게 손이 간다. 그런 내 식성에 내가 낯설어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술을 처음 마셨을 때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채소를 찾는다더니, 진짜였나 보다. 나는 평생 채소는 안 먹는 철없는 사람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나는 입맛은 그대로일 것 같았는데…. 뭔가 이상하게 아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스스로 그런 감상이 드는 게 너무 자아도취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솔직한 감정 그 자체다. 나보다 내 변화와 성장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알게 모르게 점쳤던 수준이나 기준을 넘으면 누구보다 희열을 느끼는 건 또 누굴까. 작은 성장이든 큰 변화든 가장 그걸 잘 아는 사람은 나고, 그 과정을 겪고 힘들어하는 것도 나다. 그러니 감상이 드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울 수밖에…. 그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면 좀 정신없겠지만. 때때로 어떤 변화가 나에게 일어났는지, 그 변화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정리해보는 건 자기 자신을 아는 데 제일이다. 이번의 경우 그게 입맛인데, 그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어릴 때 내 입맛은 정말 그냥 타고난 것에 불과한 특성일 뿐이다. 뭘 더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내 기본적인 선호를 담고 있는 거다. 자신의 선호를 아는 것이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좋고 싫고'가 어떤 영향을 미치길래 그러느냐고 말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자신의 선호를 안다는 건 자기 자신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내 기분을 조절하고, 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사람은 정말 사소한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나가듯 들은 한 마디에 몇 날 며칠 기분이 나쁜 적이 있지 않은가? 우연히 들은 칭찬에 며칠을 기뻐한 적은?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입맛 역시도 그런 경험에 영향을 끼친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우연히 먹은 음료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혹 갑자기 사람이 누그러진 것 같다면 방금 먹은 게 너무 맛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저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에 불과할 모습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왜 기분이 나쁘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안다면 어떨까. 감정의 원인을 안다면 아주 명쾌해진다. 내 취향인 걸 먹고, 싫어하는 건 피함으로써 불쾌한 경험을 안 하게 되는 것이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감정을 회복할 수도 있고 이유 모를 기분의 저하도 피할 수 있으니까.     


나는 내 취향을 참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호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것도 별로고 저것도 별로고. 그 와중에 유일하다시피 확실했던 건 입맛이었다. 좋고 싫음이 그렇게까지 확연히 다른 건 거의 없었다. 제일 눈에 띄는 명확한 ‘내’ 취향이었기에 입맛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으니까. 뭐, 변화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억지로 옛날처럼 다 먹는다면 그건 내 기분을 망칠 뿐이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변화도 있는 법.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처음 경험해 보기도 하지 않던가. 취향과 선호를 아는 건 중요하다. 그게 내 생활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무시무시하니까. 그게 변해버렸다고 우울해할 일도 아니다. 


영원한 건 감정이든 취향이든, 혹은 가치든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안다면 우리는 더 하루하루를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행복하고,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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