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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25. 2021

나이 먹는 게 조금 기대됩니다

염색과 나이 드는 기대에 대하여

살면서 본 머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머리가 있는가? 

나는 원래라면 내 머리의 변천사였겠지만, 어제부로 그 답이 바뀌었다. 아주 혁명적으로!     


처음 보고 내가 피곤한가 싶었다. 버스에서 막 내리시는 할머니의 머리칼이 남달랐다. 하얀 머리를 보라색으로 곱게 마무리한 파마머리.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염색하신 할머님이 드문 건 아니지만, 보라색이라니!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는데, 햇살을 받은 머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보라색이 끝 일부분에 은은하게 물든 아름다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제비꽃? 붓꽃? 판타지 세상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 같았다. 꽃의 아름다움을 담은 머리카락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정말 많은 염색 머리를 봤다. 무지개 염색, 밤하늘 염색, 은하수 염색, 투톤 염색…. 개중에는 무시무시한 가격의 미용실 작품도 있었고 수많은 색깔을 담은 결과물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다채로운 빛깔 중에 제일은 그 할머님의 빛깔이었다.  

   

그렇게 예쁜 할머님을 보니, 문득 아쉬워졌다. 사실 대학에 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염색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12년 세월을 매직만 했으니 지겹기 짝이 없었다.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란 지 오래였다. 교칙도 없는 대학이 아닌가. 대학생답게, 모든 걸 해보고 말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아주 머리카락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단단히 별렀다. 세상의 총천연색을 해보고 말겠다, 혼자 다짐할 정도로! 어떤 색을 할까 상상하며 머릿결이 너무 상해 얼마 시도를 못 하면 어쩌나 고심하기도 했다. 헛된 걱정이었다! 내 생애 염색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갈색으로. 모든 색깔을 다 해보겠다는 패기는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면, 현실을 봤다고 답하겠다. 화려한 색이 모두에게 어울리는 건 아니니까. 검은 머리였을 때 가장 어울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쉽게도 나는 타고나길 검은 머리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화려하고 진한 색보단 은은하고 소소한 게 어울리는 사람이랄까.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기엔 어울리지도 않고, 돈도 들고, 머릿결도 상하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내 야망 가득했던 목표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물론 그게 염색한 머리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단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직접 하는 것만 포기했을 뿐이다. 되려 아쉬움 때문인지 시선이 저절로 머리에 가곤 했다. 아이돌의 무대를 봐도 머리 색에 시선이 쏠리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울리는 데다 아주 다채롭고 휘황찬란하니까! 길을 가다가도 예쁘거나 화려한 머리가 보이면 눈이 돌아간다. 그게 보기 어려운 색일수록 더더욱. 언젠가는 실제로 무지개 염색한 언니를 봤었고, 언제는 선명한 청록색의 언니를 봤었다. 그런데 이번처럼 눈에도 마음에도 다가온 머리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본 머리 중에 은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할머님의 머리여서 그랬나 보다. 보통 염색한 사람은 연예인을 제외하면 20대 대학생이 대부분이니까. 그게 아니라도 청년들이 주로 튀는 색을 선택하곤 하니…. 솔직히 부러웠다. 나이를 먹어 머리가 하얘지면 어차피 하얀 머리니 그땐 나도 염색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머리에 시선이 갔던 건, 그저 그 특이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리 외에 남다른 건 없으셨는데 다른 인상을 남겨 주셨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할머니의 모습은 쉬이 나오지 않는 모습이다. 젊은이에게서도, 왜냐하면 그런 튀는 염색은 사회에서 때로 공격당하고 겉돌게 되니까. 비록 어울리지 않고 돈도 머릿결도 아깝다는 이유로 염색을 포기했다지만, 그 뒤에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곤 못한다. 너무 튀는 색을 한 거 아니냐는 주위의 말부터 알게 모르게 닿는 시선들, 가끔 머리 색에 걸리는 시비나 받고 싶지 않은 관심 같은 것들을. 세상이 달라지고 점점 개방적인 분위기라지만 그런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할머니라고 그 시선에 자유로운 건 아닐 것이다. 예전에 들은 바로는, 할머니들도 텃세가 있고 친목이 있어서 너무 튀면 안 되는 법이라고. 모든 곳이 그렇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선이 호의적이기만 한 건 아닐 테니까. 어쩌면 할머니의 머리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던 건 그런 시선에 맞선 용기와 행동이 그 뒤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도 하기 힘든 시도를 아마도 마음에 들고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하셨을 그 행동이. 머리카락의 색에서 그 모습까지 들어와서 일지도.     


시간이 지난다고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뭐랄까, 때를 놓친 느낌이다. 머리 기부를 하려고 기르는 머리를 자르면 곧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마땅치가 않다. 다시 올 때를 기다리는 게 합리적으로 보여서 조금 답답하고, 실망스럽다. 하지만 내가 염색하고 싶었던 마음을 기억하고 언젠가 하겠다는 걸 잊지 않는다면, 정말 때는 올지도 모른다. 모두가 놀라도 나만큼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웃지 않을까?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온 기쁨이 넘쳐흐를지도 모른다. 그래, 버티고 살면 시간은 내 편인 법이다!  

   

<에이번리의 앤>에서는 약혼자와 헤어진 후로 혼자 곱게 나이 든 라벤더 아주머니가 나온다. 눈처럼 하얀 머리의 독신녀임에도 마릴라와는 사뭇 달랐던 아주머니. 하녀와 단둘이서 다과회를 여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주머니처럼 나이 들고 싶노라, 앤이 소망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본 할머님은 내가 지금껏 본 분 중 가장 라벤더 아주머니 같았던 분이었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제일 빠르게 끌어낸 분. 그분의 이름도 모르지만, 깊이 감사드린다. 그분 덕에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걸 기대하게 된 것 같다. 

내 나중이 그렇게 근사하길. 그리고 그 모습이 또 누군가에게 나이 먹는 기대를 품게 만들길. 

조금 이른 소원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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