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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23. 2021

위인이 알려주는 진정한 진리

위인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읽어본 책이라면 무슨 책이 있을까. 성경이라기엔 종교가 달라 읽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동화책은 종류가 다양하니 제각기 취향이 달라 다 읽었을 것 같지 않다. 교과서도 교육 수준이 다 다르니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맹인 나라도 넘쳐나니 모두가 읽은 책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야길 바꿔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뭘까? 베스트셀러? 유명한 소설이나 에세이? 나는 위인전이 아닐까 싶다. 옛날부터 내려온 이야기, 전설 같고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위인(偉人)이란 크고 훌륭한 사람을 말한다. 어느 나라의 왕이거나, 대통령이거나, 학자이거나 과학자이거나 화가이기도 하다. 업적이라 할 만한 흔적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이야기는 한 나라에 국한된다 해도 오래오래 내려오기 마련이다. 대를 이어서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적혀 전파된다. 힘들 땐 그런 사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아이들에겐 그런 사람을 닮으라 가르친다. 인생이 무조건 힘들고 무의미한 게 아님을 이야기한다. 한계는 없다, 도전하라,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등의 교훈도 함께. 위인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 그들의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을 뽐내고 발전시킨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걸 해내고 이룩한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기란 어려운 법. 그런 이야기는 때로 국경과 민족을 넘어간다. 그렇게 전 세계에 위인의 이야기로, 위인전으로 알려진다.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읽히고 중국의 시인 이야기가 프랑스에서 읽힌다. 저 나라든 이 나라든 위인의 조건은 그리 다르지 않아서일까? 널리 퍼진 종교보다도 더 많이 읽히고 흡수된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어디에서나 위인을 바란다는 이야기다. 바르게 살고 뭔갈 해낸 사람을. 누구나 선망하고 존경받는 인간상을.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선하고, 영향력이 좋고,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누가 꺼리겠는가. 다만 그런 위인에 대한 환상이 문제다. 혹은 그렇게 위인을 ‘만들어낸’ 게 문제의 시작이다. 위인들 역시 사람이었다. 그 업적의 후광에 위인의 그늘이 가려졌던 것뿐 언젠가는 그늘이 드러난다. 그로 인한 파장은 잠시간 인류애를 상실한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누군가는 사람에 대한 신뢰나 애정이 무너진 것 같다고도 한다. 그 정도의 부정적인 면모들 이어서일까. 간디가 소아성애적 모습이 있었다거나 마더 테레사가 독재자를 옹호했다거나….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위인들의 면모들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 일부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저 위인들이 했다는 이유로 잘 수긍되지 않곤 한다. 많은 이들에게 위인은 구름 속 신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평생 바른길만 걸은 사람들.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들. ‘모든 걸 이겨내고 모든 걸 누린 사람’이니까. 마치 성공한 사업가가 고생했을 리 없다는 생각처럼, 혹은 유명한 연예인이 혼자 아파할 리 없다는 생각처럼 말이다. 편협한 시각이다. 누군가에게 환상을 가지고 존경심을 가지고 숭배하고…. 그 모든 건 자유다.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다. 그렇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는 위인들, 연예인들, 사업가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다. 우리와 흐르는 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종족이 다른 것도 아니다. 똑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도 할 수 있다. 싸우고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그런 것 하나하나에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생각해 보라. 사람은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는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모습을 담고 있는 프리즘에 가깝다. 어떤 빛을 받고 어떤 굴절면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인 프리즘 말이다. 좋아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기 일쑤다. 그럼 그렇게 위인은 실망한 상태로 끝나는 존재냐고? 아니다. 반면교사라 했다.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면에서 배우기 마련이다. 뭐가 잘못된 행동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이다. 어쩌면 진정으로 위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하다 대단하다 성인이다 신의 은혜다 칭송을 받아도 사람은 사람. 업적을 남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사람은 아니고, 숭고하다고 해서 무조건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위인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하는 건 그런 요소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단순히 봐서는 안 되며 대단한 일을 했다고 꼭 바르고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경탄이 나오는 존재는 반드시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것엔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의 인생은 반드시 옳은 면모만으로 가득한 게 아니다.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작정 그들을 선망하거나 동경해선 안 된다. 누군가에겐 그들이 가해자이자 원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그들에 대한 동경이 정당한지 의구심이 든다. 업적은 업적인데 그 업적을 만든 사람의 행태마저 그 후광으로 용서받아야 할까. 그들에게서 사람의 모습과 통찰의 중요성을 배웠으나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못하겠다. 그게 그들이 가르쳐준 진정한 교훈이니까.      


사람을 한 시선으로만, 색안경을 끼고만 봐서는 안 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그걸 이제 위인들에게도 적용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올바른 모습만 알려졌다고 해서 계속 그런 일부의 모습만 보여준다면 진정한 위인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나는 그에 반대한다. 위인들의 다른 면모를 파악하고 그 점을 함께 알릴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더 올바른 인생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인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진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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