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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29. 2021

#1. 재수의 징조

슬기로운 재수 생활, 재수는 그렇게 시작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몇 번의 전환점을 경험했다. 그렇게 긴 인생도 아닌데 그 전환점들은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바꿨고, 그 가치를 톡톡히 느꼈다. 그중 하나는 그 전환점 가운데 최고였고 가장 의미 있었다. 그건 내 의견만이 아니라 내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가 다 인정한다. 그래서 그 시기인 재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금기시되기도 하고, 부정적이며, 암담하게 보이는 그 시간에 대해서.




재수는 없다!     


저 말을 듣지 않고, 결심하지 않은 수험생이 있을까. 대한민국 안에서 그런 학생을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일 것이다.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친척이든 선배든 한 마디씩 하는 게 그 시절이니까.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한 얘길 하고 있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이야길 흘리기도 했다. 별 할 얘기가 없으니 재수는 안 된다는 얘길 한다 생각하며. 누가 알았을까! 그런 내가 재수생 타이틀을 얻을 줄.    

 

사실 고3의 반절이 다 되어 갈 때쯤 느꼈다. 아, 이번엔 틀렸다는 걸. 나는 도저히 올해 안에는 대학에 못 간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정확히는 내가 준비해 온 대학에는. 그 느낌은 정말 외면하고 싶은 감각이었다. 더군다나 그걸 온몸으로 예상해도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의지가 없다거나 쓸데없는 소릴 한다고 할 테니까.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올해는 될지 안 될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그런 걸 아는 데엔 딱히 신기가 필요 없다. 100일 1000일의 정성도 필요 없다. 그냥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자신이 공부하는지 안 하는지, 그림을 잘 해내고 있는지 아닌지! 그걸 알면서도 게으름 피우느냐, 아니면 자신을 속이면서 지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도 아니면 어찌할 줄 모르고 붙잡고 있는 것이고. 재수생 대부분은 이런 고3을 보낸 학생들이다. 공부 열심히 하고 계속 성실했는데 재수를 했다? 수능 하루만 컨디션 조절을 잘못했다? 흠. 내가 본 수십 명의 재수, 삼수, 사수, 오수생 중 그런 사람은 손에 꼽힌다. 있긴 한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그러니 그건 그저 개인의 자기 위로에 불과할 확률이 높다.      


사실 그런 예상을 하는 건 쉽지 않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고 할 게 많아 잠이 부족한 시절인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내가 그걸 느낀 건 내가 준비한 수험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기와 공부를 병행하는 미대 입시생이었으니까. 나는 실기를 서울에서 준비했기에 매 주말이면 올라가야 했다. 지방에 사는 학생의 힘겨운 전쟁이었다! 왕복 4시간을 이동하고, 다음날에도 쉬지 못하는 일정이라니.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다. 어떻게 해냈는지 잘 모르겠다. 몸이 지치고 피곤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본능적인 감각이 일깨워졌나 보다. 이대로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이 평가받을 때 선생님들의 표정과 내 심정은 그런 미래를 보여줬다. 밝지도 탄탄하지도 않은, 장담할 수 없는, 멀지 않은 훗날.     


누군가는 미대를 준비하는데 그림을 못 그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알 듯 노력이 반드시 같은 결과로 나오는 게 아닌데도. 또 타고난 재능이란 게 예체능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미술학원에서 하위권 학생이었다. 도무지 그림이 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학원에 오는 걸 그만둘 수도 없었고. 결단을 내리기 가장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필요한 건 성장할 시간이었다. 아주 간단한 답이지만 그걸 고3 때 느끼는 건 절망적이다. 재수해야 한단 길밖에 안 보이니까!     


학원 선생님들의 표정, 부족한 실력, 불안정한 성적, 지친 몸, 느껴지는 본능적인 감각. 그 모든 게 내가 재수를 할 거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내 재수 생활의 첫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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