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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r 31. 2021

#2. 고3 때의 괴로움

슬기로운 재수 생활, 고3때의 힘든 나날에 대하여

   

재수의 징조는 야금야금 나를 속에서 갉아먹었다. 불안함, 초조함, 스트레스, 자괴감의 형태로. 그 감정들은 당연히 수험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를 더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또 몰라도! 고 3의 나는 하필이면 미술학원에서도 사이가 안 좋은 학생이 있어 예민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과 갈등해 마음 붙일 곳도 마땅치 않았다. 어디도 공부만 하는 곳으로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마음 편히 공부만 하라고 해도 힘들 판에 감정적인 갈등이 그 정도였으니…. 공부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변명으로 느껴졌을지 모르나 그건 분명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게 문제라고, 왜 그랬냐고 지적하진 말아 주길. 사람은 때로 그게 어떤 순간이든 실수를 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중요한’ 시기에 그런 실수를 한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면 그걸 왜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묻는다면 부디 조금 더 생각해 보라.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바로바로,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사회인이든 학생이든 여자든 남자든 대부분이 그렇다. 수험생이라고 문제 해결에 대한 묘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게 있다면 진즉 사교육 세상에 퍼졌겠지. 조금 냉정한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해 보면 나았을 수도 있다. 모든 문제는 감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기도 하니까. 하지만 문제가 바로 그거다! 감정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에 그런 해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특히나 19살의 소녀 수험생은 더더욱…. 조급하고 열정적이라면 모를까, 차분하고 냉정한 존재가 되긴 힘든 법이다. 결국, 나는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조금씩 재수라는 늪에 침잠하고 있었다.      


내가 가라앉는 걸 느끼는 건 실로 불쾌한 일이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스트레스가 나를 감싸는 기분이라 어찌할 수 없는 것만 같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아는데 말할 수도 없다. 수험생이 이번 수험 망할 것 같다고 하는 건 너무 흔한 일이 아닌가. 그런 말을 해봤자 내 의지박약의 문제로 나올 뿐이다. 지친 학생이 이대로 가다간 안 되겠다고 느껴도 소용이 없다. 너무 정 없고 냉혹하다고 여겨질지라도 그게 현실적인 소감이다. 자신의 불안, 초조, 자괴감, 질투, 짜증, 서러움 같은 감정을 치사량까지 느끼는데도 말하기 어렵다. 고3, 수험생의 그 힘겨운 시간의 제일 큰 고통은 수험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수험생이라는 틀 아래 모든 감정을 눌러야 하는 게 최고의 괴로움일 수도 있다. 안타까운 건 그런다고 마냥 보상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만일 고통을 견딘 만큼 보상이 온다면 대환영이다. 그게 확실하기만 한다면 수험생활도 그리 힘겹진 않을 것이다. 과연 그렇겠냐고? 그리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아주 좋은 예시가 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곤 하는 도전을 보라.      


‘당신은 1년간 갇혀 살아야 한다. ~~ 한 조건이 갖춰진 상태로 말이다. 대신 버티면 3억을 준다. 당신은 이 실험에 응하겠는가?’     


이런 가상의 도전 글이 올라오면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깔끔하게 나타난다. 그게 뭐 어렵냐는 반응이다. 3억이 아니라 1억이라도 하겠다며 글을 비웃기도 한다. 사람이 1년간 갇혀 있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럼 왜 저 도전 글에 다 같은 반응이 나타나며, 우습게 보는 것이겠는가? 이유는 하나다. 대가가 3억이라는 아주 정확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며 쓸모도 있고 모두가 인정해주는 보상. 그런 보상을 실제로 얻기란 힘들다. 물론, 모든 사회 안에서 그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어 헤매고 불안해한다. 수험생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쓸모 있게, 열심히 성실히 시간을 보내도 자신의 시간을 늘 장담할 순 없다. 그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성장하고 얻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안정과 분명함은 실로 매력적이다. 공무원과 교사가 왜 그리 인기를 얻겠는가. 쉬워 보여서? 시험만 치면 되는 직업이라서? 쉬운 직업이 따로 있겠는가? 시험이 만만하겠는가? 그저 하루아침에 잘릴 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 보아도 우리가 미래에 대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알 수 있다. 수험생은, 그 불안을 처음으로 뼛속 깊이 느끼는 시기다.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 어딜 택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달라진다. 그 무거운 짐을 처음 마주하고 견디는 시간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겠는가. 자신이 괴로워하는 만큼 좋은 미래가 기다린다면 기꺼이 견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괴로워한다고 반드시 빛나는 미래가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정말 끔찍할 수도 있다. 그 수많은 가상의 결과는 수험생들의 마음에 짙은 아픔을 남기곤 한다.     


수험생 시절을 지나면 많은 게 달라진다. 20살과 19살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20살은 인생에 대한 갈피를 조금 잡게 된다. 시야가 넓어진다. 수능은 인생이 갈리는 시기인 줄 알았는데, 12년을 바친 시험이라서 그게 전부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안다. 잘 해왔어도 수험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갑자기 수험에 성공하기도 하고. 수험에 성공했다고 다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되려 수험에 실패한 사람이 더 잘 나가기도 하고. 조금 허무해도, 단번에 결정되는 인생이란 없으며 보장되는 미래란 없단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걸 수험생 때 알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만 알아도 수험생 시절의 괴로움은 반절 넘게 사라졌을 텐데. 불가능한 걸 알지만 참 아쉬운 일이다.      



재수했다고 무조건 수험생활을 느긋하게 보냈다는 건 아니다. 속으로 분투하고, 고민하고, 힘겨워할 때 누군가가 더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을 뿐. 누구보다 괴로운 수험을 보내고 재수를 택했을 수도 있다. 재수생이든 삼수생이든 고3이든 모든 수험생은 괴롭다. 그 괴로움을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리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내가 수험에서 느낀 괴로움은 재수 생활의 괴로움에 비하면 정말… 별 것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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