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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04. 2021

#4. 그렇게 재수는 시작하고

슬기로운 재수 생활, 재수의 시작과 결심에 대하여

재수 결정이 났다. 

수능 날이 한참 지나 끔찍한 실기 입시 준비도 끝나고, 대학 합격 발표도 끝난 다음 날.      


사실 단 하나의 선택지라고 생각했었다. 수능이 망하고, 지원한 대학이 다 떨어졌다면 남은 선택지가 그 외에 더 있을까? 부모님은 내게 결정권을 주셨다. 그때는 결정권이 의미가 있는가, 단 하나의 길이 아닌가,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수능이 전부는 아니다. 꼭 재수할 필요도 없다. 바로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을 쳐서 취직해도 좋고, 다른 길을 알아봐도 좋다. 정말 다양한 길이 있으니까. 재수만이 길은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의 나는, 재수라는 길 밖에 안 보였다. 지금에 와서도 그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게 성장하게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수능이란 관문에 제대로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알고 있어서, 그게 기분이 나빴다. 다들 최선을 다해 부딪히고 미련 없이 지나는데 나 홀로 최선도 다하지 않은 상태로 임한 것 같아서. 그건 일종의 승부욕이었고, 자존심이었다. 이렇게 끝나면 후회할 게 분명했다. 재수의 결심은 그렇게 불붙었다.     


미대의 입시는 실기와 성적,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수시로 간다면 다른 요소도 있겠으나 그건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실기는 겨우내 입시 준비를 하면서 실력이 조금 늘어, 성적보다는 희망이 보였다. 더군다나, 고3 때 성적이 나오지 않아 근 2년을 준비한 대학에 원서도 못 넣은 상황. 무엇보다 성적이 우선이었다. 재수를 결정하자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재수 결심이 불붙은 이상 거칠 게 없었다. 해야 할 건 명확했다. 핸드폰을 없앨 것. 독학은 불가능하니 학원을 찾아볼 것. 실기는 공부 학원에 적응한 후 다시 시작할 것. 이 결정은 결국 내가 재수 생활을 꽤 성공적으로 보낸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내 잘못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잔인할 정도로 내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고 나니 망설임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을 끊을 걸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만나고, 차츰 대비해 나갔다. 3월부터는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재수 생활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그때는 졸업식도 끝나서 오히려 가뿐했다. 미묘한 뒷담과 눈치가 발발하던 학교는 수험생활엔 좋지 않았으니까. 아예 끝을 맺고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서울이니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괜히 눈치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수험해야 하니 힘들겠지만, 솔직히 처음 한 수험생활은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 해낸 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하라면 고난이지만, 실수하고 빈틈 투성이었던 생활을 고쳐 다시 하라면 기회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재수는 그렇게 시작했다. 1년간의 생활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 누가 알았을까? 미술학원 선생님도, 친구도, 부모님도 전부 내가 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었다. 정말이지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재수라는 경험은 힘들고 눈물 나고 버거웠다. 하지만 절대, 부모님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는 그 자리에서 재수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결국 나를 위한 길이었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 단순하고 명확한 경험인 재수의 결심에서부터 나는 많은 위안을 얻었다. 

내 인생을 내가 택했고 내가 나아간다. 

그 느낌은 지금도 내가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      


그러니 누군가 지금 재수에 힘들어한다면, 만족스럽지 않은 수험 결과에 힘들어한다면 묻는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선택으로 수험을 하고 있는가? 그 차이에 따라 아주 다르다. 재수한다 해도 굳건히 나아갈 것이며 온갖 지원을 받는다 해도 무너질 것이다. 그 차이는 당신의 수험 결과에서 드러난다. 운이 좋다, 몸 상태가 좋았다, 이 모든 이야기 전에 시험지는 참으로 투명하다. 제법 공부한 대로 드러난다. 당신이 어떻게 공부하고 생활했는지에 따라 시험지는 그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가장 손해 없고 공정한 거래가 아닌가! 그런 기회를 놓치기 아쉽지 않은가? 부디 당신의 길을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나아가길 바란다. 가능하면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대부분 잊고 살지만, 어떤 시절이든 끝나기 마련이다. 영원할 것 같은 자신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걸 잊지 말고, 당신의 길을 찾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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