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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15. 2021

올바르게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언제나 있다

어른 이야기 세번째, '착한 사람'에 대하여

많고 많은 어른이 역사에 있었지만, 다 좋은 이들은 아니었다. 인간말종부터 악인, 쓰레기 같은 인간상도 있었다. 예전에는 왜 이렇게 나쁜 사례를 남겨두었는지 의문이었다. 타산지석이라고 하지만 안 좋은 걸 보고 물들면 어찌하나 싶어서. 다행히 얼마 안 되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러지 않은 사람들, 착하고 올바르고 잘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더 부각되어 어떤 방향으로 내가 나아가야 하는지 확실해지곤 했다. 말하자면 그런 악인의 모습이 그림자 역할을 해주어 빛이 더 황홀해진 셈이다. 

     

어느 세상이나 착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 되기가 더 쉽다. 착하려면 인내도 해야 하고 법도 지켜야 한다. 어느 정도 자기가 손해 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때론 배신당할 수도 있고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옳은 신념을 구부리지 않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저런 사람이 현실에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반면 나쁘기는 얼마나 쉽고 편한지! 마음대로 다니고, 신경 쓸 것도 없고, 자기만 생각하면 된다. 배신을 당하느니 먼저 배신하고 이용을 당하느니 자기가 조종하면 된달까. 정말 편한 길이다. 이렇게 보니 왜 그토록 역사에서, 교육에서 착하길 중요시하는지 알 것 같다. 만약 세상이 악인으로 가득했다면, 인류란 종족이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미래도 희망도 없고 약육강식의 자연 그대로 돌아가 모두가 죽을 테니까. 그러니 그걸 깨우친 사람들은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관용과 어짊, 포용을 노래한 것이리라. 4대 성인이라는 예수,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각각 사랑, 인(仁), 자비, 진리가 아니던가.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걸 명심해야만, 계속해서 대를 타고 전해져야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죄다 나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언제까지 유지되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수긍이 된다. 요즘은 나빠야 손해 안 보고 산다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배려를 당연시한다. 인사하고, 존댓말 하고, 때론 양보하고, 말 하나 행동 하나를 주의하고. 그게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고 평생을 끝내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토록 ‘착한 아이’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어른은 한 행동이, 한 원인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안다. 먼저 배우기도 했고 직접 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착한 행동을, 착한 말을, 올바른 것들을 가르친다. 모두가 살아나는 길을,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지만 사람은 환경이 제각각 다르다. 그 환경 때문에 사람은 ‘올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 힘들다. 이는 꼭 경제적 환경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생각해 보라. 역사상 수많은 어리석은 왕과 폭군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성이 뛰어나곤 했다. 예술과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의 직무를 내던진 사람들 아니었던가.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의 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타고나길 제왕의 별 아래 태어났고 그래서 그렇게 될 순 없었다. 그런 환경은 군주에게만 가혹하지도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아무리 장사여도 시대가 평화로우면 그저 시정잡배일 뿐이다. 만일 전쟁 시국이었다면 당장에 승진해 대장군까지도 올랐겠지만….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운명과 운, 수완이 핵심적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저들은 운명을 잘 잡았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수완을 펼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타고난 천성과 주어진 환경 이외에도 주변에 누가 있느냐 없느냐도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던가. 어릴 때 본 것, 어릴 때 배운 것은 놀랍도록 오래간다. 서운하거나 슬프거나 힘들거나 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아서 어릴 때 받은 상처나 학대, 설움이 평생의 그림자가 되기도 하니까.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흡수력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토록 ‘미성년자 열람 금지’니 15 금이니 19금이니 하는 게 있는 것이다. 어릴 때 난폭하고, 싸우고, 갈등의 정점을 보면 당연히 충격을 받는다. 만약 그 충격에 그걸 다시 찾고, 즐기게 된다면 그게 중독이 아닌가. 요즘은 왜 어린이들을, 미성년자들을 차별하냐고 그런 걸 없애라고 항의가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핸드폰 잠금 앱에 악플 테러를 하거나 별점 테러를 하기도 한다고. 음, 그에 대해 앞선 얘기와 함께 그런 법이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에 그냥 나온 건 없고, 그중 일부는 아주 이기적인 의도로 탄생한 것도 있지만 수많은 법과 도덕은 아주 오랜 시간 인류가 공들여 생각해 온 결과물이라고. 그에 대해 무조건 반항하기엔 아직 너무 생각과 경험이 얕지 않냐고 말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분명 예로부터 내려온 것에도 가치가 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사람이 ‘착하고 올바른’ 걸 끊임없이 이야기한 이유는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인데. 그걸 아는 아이가, 어른이 얼마나 될까? 

    

길게 보면 착한 사람이 살아남기 유리한 법인데.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가득한 좋은 사회는 얼마나 이루어지기 힘든지…. 어휴,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언제야 될지 모르겠다. 갈수록 세상은 혼란해지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걸까? 위안은 있다. 근거도 있다. 역사를 보라.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던가. 연쇄 살인마가 연쇄 살인을 하기도 전에 잡히고, 폭력적인 사람은 수많은 제재와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세상에 하소연해 위로와 해결책을 얻을 수도 있고, 손해를 입으면 청구할 수도 있고, 결혼 생활이 끔찍하면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다. 한 나라에서 일자리가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일할 수도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볼 수도 있다. 여성과 아이의 인권은 거의 없던 시절, 왕과 귀족에게만 풍요롭고 백성은 무조건 바치고 엎드려야 했던 시절, 억울해도 그 억울함 풀 길 하나 없던 시절, 이유 없이 끌려가 죽고 다치고 노동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나아졌나!   

  

옛날 그들이 꿈꾸던 게 이미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마냥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나쁜 사람들이 적고, 그 영향이 사소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아주 적고 그 영향이 작은 것도 아니니까. 그걸 믿고 한 번 살아 보면 될 일이다. 착한 사람들의 진가와 전력은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 아닌가. 누가 알까, 지금의 어르신들이 얘기하시는 것처럼 내가 나이 들어 세상 참 좋아졌다고 미소 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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