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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19. 2021

왕자님 공주님은 정말 행복했을까요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박신영>을 읽고

어릴 땐 참 질문이 많다. 이건 왜 그렇고, 저건 왜 그런지 궁금했다. 세상 모든 걸 알아야 직성이 풀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해가 왜 뜨는진 물어봐도 동화를 물어보진 않았다. 왜 신데렐라는 그렇게까지 무도회에 가고자 했는지, 왜 로미오와 줄리엣은 같은 도시면서 그토록 앙숙이었는지. 왜 그 많은 왕자가 백마를 타고 떠돌아다녔는지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거였다. 신데렐라는 신데렐라니까, 왕자는 왕자니까. 그게 그들의 역할이었고 사명으로 보였다. 동화는 그저 동화 속에만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한지 싶기도 했고. 그래, 그들은 동화 속 인물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전해진 허구의 이야기. 그렇지만, 그걸 전부 가짜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동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림 형제를 비롯해 수많은 동화 작가가 왕자와 공주를 등장시킨다. 이는 유럽에선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 중심으로 성장하고, 쪼개진 공국이 많아 왕자와 공주는 넘쳐났기 때문이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그때 모든 왕자와 공주가 외동이었을까? 천만의 말씀. 가족계획도 피임도 없는 시절이다. 생기면 낳는 시절에 살아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2~3명 정도는 있었으리라. 민가라면 괜찮다. 농사를 지을 때 형제자매는 큰 자산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동력이기 때문에 반가운 존재였다. 왕족과 귀족이 문제였을 뿐이다. 재산은 나눌수록 적어지는 법, 권력이 강해지려면 더 적어져선 안 됐다. 첫째는 권력을 계승하고, 둘째 셋째는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이때 주어진 길은 3가지. 성직자가 되거나, 용병으로 활동해 무력으로 땅을 차지하거나, 부유한 처가를 얻거나. 성직자도 나쁜 길은 아니고, 답답한 게 싫다면 용병도 괜찮다. 그래도 역시 최고는 결혼이다. 재산도 얻고, 가족도 생기고, 잡음도 없고,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고. 공주님을 얻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 누가 길을 떠나지 않겠는가. 멋있어 보여야 하니 백마 하나 골라잡아 타고, 공주님을 향해 나아갔으리라. 그러다 백설 공주를 만나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만나고…. 참, 현실적인 연애 사정이다. 옛날 동화에선 연애는 없고 서로 호감이 생기면 결혼하는데 어쩌면 서로의 목표가 사랑이 아니라 결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맞선 보듯 어느 정도 ‘괜찮으면’ 결혼한 것이 아닐까.      


이런 현실은 공주라고 다르지 않다. 공주는 더 심했다. 지참금이 넉넉하지 않으면 아래 귀족이나 평민한테 시집가는 게 아니라, 수도원에 가야 했다. 그래야 체면이 섰기 때문이다. 영화든 이야기든 타락한 수녀 이야기는 발에 치인다. 그 수를 자세하게 헤아리기란 힘들다. 처음에는 어느 종교든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 종교를 믿을수록 틀어지는 곳은 있기 마련이라고. 뭘 몰랐던 거다. 수녀들이 종교로 귀의한 게 자발적이지도, 풍요로워서도 아니라는 걸 몰랐다. 그저 강제적으로 온 하숙생에 불과한 것을. 반항심과 억울함이 없었을 리가! 그런 모습조차 마땅치 않게 본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였다. 그녀들이 카사노바나, 다른 사내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린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마음대로 정하지도 못한 채 괴로운 데 누가 무조건 종교만 의지한 채 살아가려고 할까? 자신이 힘들 때 도와주지도 않은, 현실을 모르는 신을 말이다! 그럴 때일수록 믿어야 한다는 건 지나치게 어리석은 위로다.     


공주들은 왕비가 되어도 편하지 않았다. 왕비는 왕자가 떠돌이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면,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외국으로 가 왕비로 살아야 했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 살기도 힘든데, 정 붙일 곳도 적었다. 마녀로 몰리는 일도 있었다. 백설 공주만 해도 젊은 마녀 왕비가 나오지 않던가. 그녀는 거울을 자주 봤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집착했다. 백설 공주를 쫓아내기 전, 그녀가 한 일은 그것뿐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왕비가 과연 마녀였을까? 거울은 그 당시에 아주 뿌연 재질이었다. 마냥 투명하고 깨끗하지 않아서 아주 신비롭고 모호했을 것이다. 왕비 대부분이 외국에서 왔을 시절, 이국의 여인이 거울 앞에 있는 모습은 많이 꺼려졌던 게 아닐까. 언어가 조금 다른 것이 주문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냥 왕비도 아니고 새 왕비라면 더 그 ‘다르다’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으리라. 기존의 왕비가 이미 왕비 상에 대한 인식을 심어두었기에 그것과 다르면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어느 경우든 두 번째는 이미 기준이 존재하니까. 자식까지 이미 있다면 그 기준은 더 어려워진다. 새 왕비가 기댈 곳은 왕뿐인 것이다. 새 왕비니까 왕도 더 신경 쓸지 모른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가고, 아끼게 될 수도 있다. 이게 첫 왕비의 자식과 신하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사실 아주 당연하고 좋은 관계다. 남편에게 기대고 적응하면서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토대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보진 않았을 테다. 새 왕비가 없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에겐 그녀가 악의 근원으로 보이지 않을까? 왕을 홀리고, 말이 없고, 거울 앞에 자주 서 있는 여인. 소통의 부재와 고독과 악의가, 그녀를 마녀로 만들었다.      

동화 속 왕자와 공주는 늘 행복했다. 행복한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왕자와 공주일 리가 없다. 불행하다면 그들이 진정한 왕자나 공주가 아니다. 마녀이거나 가짜이거나…. 참 단순한 나누기다. 왕자라고 해서 방랑을 좋아했을까? 집 안에서 편안히 놀거나 다른 걸 하고 싶지 않았을까. 공주라고 외국에 가고 싶었을까? 마녀라고 미모에 집착하고 싶었을까.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아주 적은 선택지였다. 그들이 행복해 보인 건 그저 일반적인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생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의 심정은 기록된 바가 적다. 행동은 넘쳐나는데 스스로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도 드물다. 역사 속 가장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공주와 왕자가 행복의 대명사로 쓰이는 걸 보면, 평안함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걸 보면 옛 왕족들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어떻게 저렇게 잔인한 말을 내뱉느냐면서 구슬피 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의 인생은 겉보기만 중요하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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