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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22. 2021

동화 뒤에는 늘 현실이 있는 법이다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박신영>을 읽고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멀고 먼 옛날에…. 동화 대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주 먼 옛날 언젠가로 모두를 데려간 후에 말이다. 그렇게 듣고 있노라면 정말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환상적인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구름은 반드시 하얗거나 오색을 띨 것 같고, 날씨는 항상 맑고. 세상은 아름답고 가끔 오는 고난은 아주 짧게 지나가고, 이내 즐거울 수밖에 없는 느낌. 하지만 동화는 정말 그렇게 우리와 떨어져 있는 존재일까? 동화만이 아니라, 그 많은 설화와 전설은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일까. 그저 공상에 불과한 말 몇 마디인 걸까?     


누군가는 동화는 동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 돈을 벌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그저 그 정도에 불과한데 무슨 의미가 그리 거창하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도 모두 동화를 알지 않던가. 모두가 안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대단한 일이다. 좋아하지 않아도 알려면, 엄청나게 유명하고 대중적이어야 한다. 매체가 넘쳐나는 지금도 ‘모두가 아는’ 주제가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가. 과거는 더 힘들었으면 힘들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그런 역사에서도 동화는 늘 자리했다.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내려왔고 전 세계에 살아 숨 쉰다. 이 정도면 우리가 왜 동화를 생각해봐야 하는지 느낌이 온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보자. 과연 동화는 과거의 이야기에만 국한된 걸까.     

 

사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허탈할 정도로 단순하다. 당연히도, 아니다! 동화만큼 현재 진행형인 문화가 있으랴. 역사가 반복되듯 동화도 반복된다. 혹 마르코란 이름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고 하면 깨달음의 탄성이 나오려나? 엄마를 찾아 떠난 어린 소년의 이야기는 그 이름부터 유명하다. 엄마의 소식이 끊기자 가족을 대표해 찾아 나선 어린아이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이사 간 집까지 알아낸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짐수레를 얻어 타기도 하고… 각고의 고생 끝에 엄마를 만난다. 그제야 엄마는 희망을 찾아 수술을 받는다. 그 당시 남부 이탈리아는 소작료를 내고 나면 남은 게 없는 시국이었다. 산업혁명이 진행된 서북부 유럽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연히 기회를 찾아 아르헨티나나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부유한 국가였고, 노동력이 부족해 이민자를 환영했다. 성공한 이민자는 가내 노동자들을 원했고, 많은 여성이 살림을 보태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중 한 명이 마르코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타국으로 나섰고, 그러다 병에 걸렸고, 자칫하면 가족과 영원히 이별할 뻔했다. 마르코는 엄마를 그리워했고 늘 보고 싶어 했다. 엄마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그 먼 여정을 소화해냈다. 아무리 어른스러울지언정 어린 아이다. 대견하고 자랑스러워도, 우선은 안쓰럽다. 아이가 엄마를 찾아 그런 고생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괜찮은 것일까. 이게 그저 그 시절의 이야기일 뿐일까.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할 말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나온 젊은이들.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예전보단 연락이 더 편해졌지만, 한계가 있다. 서로 그리워하고 고통받고 외로워 힘들어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주 다를까? 아마도, 마르코의 이야기와 그다지 차이 나지 않을 테다. 마르코처럼 엄마나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있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 안에서만 동화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동화와 함께한다. 수많은 ‘신데렐라형 여주인공’이 나온다. 명예를 바란 달러 공주들은 한때 신데렐라의 이름을 달기도 했다. 영웅들이라고 뒤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장 세상과 함께한 존재들이다. 잊히지 않은 채, 그저 사람들에 의해 오르내린 이들. 대표적인 예시로 잔 다르크가 있다. 프랑스의 성녀이자 백년전쟁의 영웅! 너무 역사적이라고 동화가 아니라고 하진 말자. 그녀의 이야기는 동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 않은가. 나라를 구하란 사명에 그렇게 나선, 한낱 백성의 기록이 전설로 남은 적이 또 있던가! 그러나 그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위상은 위태로웠다. 잔 다르크는 세상에 의해 명명되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영웅이었다가, 마녀였다가, 또다시 영웅이었다가. 그녀의 기세는 놀랍다. 정체 이전에, 실력과 분위기 쇄신으로 전쟁을 끝낸 명실공히 장군이다. 사기를 북돋고 나라를 위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실제로 승리를 이끈 사람이다. 그녀가 무너진 건 그녀가 백성이었기 때문일까. 나라보다 제 위상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여인이고 백성이고, 모든 면에서 아래였던 존재였기 때문일까…. 공주 왕자보다 영웅은 고귀하다. 태어나면서 받은 자리가 아니라 본인이 쟁취한 자리임에 그러하다.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권위를 차지한 자들은 영웅을 절대 환영하지 않는다. 역사 속 장보고가 그렇게 사라졌고 이순신이 그런 고생을 했었던 걸 보면, 권력은 모든 양심과 감사를 가리는 어둠 그 자체로 보인다. 동화가 현실에서 부서지는 가장 큰 이유는 권력이 존재해서 그런 게 아닐까. 권력과 권력욕이 없었다면 그 자체로 동화 같은 이상 세계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 많은 욕망 중에 그것만 없다고 가정했을 뿐인데, 이토록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이야기는 결코 허공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늘 땅에서 자리 잡고 피어난다. 그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그 빛깔과 향기와 모양새가 다채롭다. 때론 고통스럽고, 때론 고약하지만, 그 씨앗은 아스팔트 위에서도 피어난다. 아무리 고난 속에 있어도 이야기는 살아난다. 고난 속에서 본래의 빛을 발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동화는 현실과 별개라 할 수 없다. 물론 다니다가 요정을 만나지도, 두꺼비나 참새가 우릴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기적 같고 믿기지 않는 순간은 우릴 찾아오기 마련이다. 동화 속의 악역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동화의 고통을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우린 동화로 현실을 이겨내지 않던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동화는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안다. 슬픈 끝맺음은 바뀐다. 벌을 받을 자는 어떻게든 받고, 선한 자는 그 복을 누린다. 고통만이 존재하란 법은 없다. 그러니 동화 속 기쁨과 행복을 기대해봐도 좋다. 그토록 현실에 가까운 동화가 아름다운 건, 분명 현실이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덕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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