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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24. 2021

어쩌면 가장 대단한 존재들

<조선시대 민중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이수광>을 읽고

  잡초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농사한다면 그저 꼴 보기 싫은 풀일까? 농사를 모르면 그냥 이름 모르는 풀에 불과한 걸까. 그 어떤 의의나 의미도 없는 걸까? 많고 많으니까, 귀하지도 않고 특별히 효능도 없고 곱지도 않다는 이유만으로…? 잡초에 대한 생각은 정말 심란해진다. 잡초는 민중으로 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잡초에 대한 인식을 보면, 알게 모르게 민중에 대한 인식도 느껴진다. 매화, 국화, 대나무 같은 ‘고급 식물’이 아닌 이름 없는 풀은 정말 민중의 한이 맺혀 생겨난 풀 같기도 하다.      




민중은, 잡초처럼 이름이 없기 일쑤다. 그 모두를 뭉뚱그려 민중, 민초, 백성, 군중이라 표현할 뿐이다. 그 개인을 알기 위해선 아이러니하게도 상류층을 뒤져야 한다. 상류층이 본 민중의 개인만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민중의 모습이다. 그들 그대로는 모습을 남길 수 없었기에 그들의 자서전 같은 솔직한 기록은 바랄 수가 없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오랫동안 상류층이 글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누린 이유가 보이는 것 같다. 핍박받는 이들의 기록이 남겨지는 순간 후세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인 신분과 계급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니 양반들, 관리들, 왕족들이 민중의 기록이 남겨지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을까! 분명 흔적이 남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터. 이해는 가지만 참으로 악독한 수법이다.      


기록에 남아 있어도 민중은 그 존재가 흐릿하다. 태어난 시기, 태몽, 생애와 업적이 기록되는 이들과는 달리 아주 짧게 기록되어서일까. 그들은 선비의 시 뒤편에서 울고 있고, 그림 뒤에서 한숨을 쉰다. 선비의 글자 몇 자 뒤에서만 확인이 가능할 때도 있다. 본디 예술의 영감이 되려면 그 모습이 남달라야 한다. 그토록 많이 민중의 생애가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면 그 일생이 다채롭고 깊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존재감이 흐릿한 건 그들이 대놓고 보이지 않아서일 뿐이다. 되려 웬만한 역사의 순간들보다도 그들의 생애는 복잡하고 어지럽다. 강하고 빛나며 힘이 있다. 과장이 아니다. 충분히 위인이 될 만한 사람도 있고 역사를 바꿨을 사람도 있다.      

너무나 힘이 세서 북벌에 힘이 되고자 효종의 군대에 입대했건만 효종의 요절로 절망한 장사가 그렇고 재주를 감추고 살았다던 이인 진종환이 그러하다. 임금의 군악대를 잔치로 불렀을 정도로 패기 넘친 거지 왕초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평생을 품팔이 장수로 산 장사도 실력을 뽐낼 수만 있었다면 날개를 달고 세상을 바꿨을 거다. 그들의 재주가 인정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역사가 달라졌을까. 지금의 국경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무술과 무인을 천대했던 조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문무를 합쳐 양반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면, 무엇보다 태조 이성계가 장수였다는 걸 생각하면 마땅히 무를 대접해 줬어야 한다. 고려 때보다는 환란이 적었다곤 하지만 왜란과 호란을 당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라. 조선을 통틀어 뚜렷한 자취를 보이는 장군이 이순신 장군밖에 없지 않은가! 흥! 500년 역사에 장군감이 그것뿐이었으리라고! 이순신 장군조차도 왜란 덕에 제 능력을 뽐낼 수 있었다. 전쟁이 잦아야 한단 소리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상관없을 정도로 장군을 육성했어야 한다. 민중의 안타까움과 비극에는 반드시 이해할 수 없는 귀족의 행태가 보인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 말이다. 항상 지배층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 대가는 민중이 치른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민중 중에는 그런 지배층보다 백성과 이웃을 돌본 이들도 있었다. 허준이 높이 평했던 심의 안경창이 그렇고, 너무나 청렴해 내관의 미움까지 산 아전 김수팽이 그렇고, 깨달음을 얻은 듯 바보 같지만 참 대단한 안선원이 그렇다. 안경창은 내의원의 자리에 오를 정도였는데도 세 가지가 없었다고 한다. 화, 욕심, 재산 말이다. 요즘의 의사들보다도 훌륭한 모습이다. 이런 사람을 의사들은 알고나 있을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닐까…. 의사가 돈 버는 직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의 사명이, 사람을 살려야 하는 직업의 천명이 빛을 잃었다. 모두가 안경창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돈 위주로만 행동하는 건 분명 올바르지 않은 일이다. 하기야 그건 의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비리와 뇌물 수수가 넘쳐나는 지금 현대가 아닌가. 아전 김수팽은 동생 부부가 부업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대전 내관의 명이라도 국법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아전의 수탈이 심했다는 건 정말 유명한 일인데 그런 사람도 있었다니 놀랍다. 누군가에겐 칭송을 받았겠지만, 누군가에겐 미련하다고 들었을 텐데. 청렴하고 곧기가 영조도 알 정도여서 그 청을 들어줄 정도였다니, 참….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비슷하게 더럽고 복잡한가 보다. 그 와중에도 올바르고 정직한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고. 상황이나 배경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 옛날에도 나쁜 일은 다 있었으니까. 못된 이들은 못되게 굴었고 바른 이들은 바르게 지냈다. 그러니 상황이든 배경이든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온갖 것보다 인품과 태도가 결정적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나는 우리가 보는 잡초가 너무 편협한 시선만 받는 것 같다. 잡초는 말 그대로 풀이다. 식물이고 생물이다. 초식 동물의 양식이 되기도 하고, 아스팔트든 어디든 비집고 살아남아 푸른 기운을 선물한다. 우리가 몰랐던 것뿐 많은 영양을 품고 있어 새로이 조명되는 잡초도 있다. 그런 면에서, 민중은 잡초와도 같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지, 민중은 지혜롭고 대단했다. 알려질 정도의 환경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옛 민중은 신분의 한계로 재주가 있었음에도 활용하지 못했고, 지배층보다도 지혜롭고 진정 베풀 줄 알았건만 알려지지 않았다. 정말로 아쉽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고 밖엔 할 말이 없다. 잡초 같은 민중, 잡초처럼 질기고 생명력 있는 민중,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하지만 강하고 어디에나 있는 민중을 우리는 이제 다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위인들의 기록을 넘어서, 지배층의 시선을 넘어서 그들의 모습을 보자. 어쩌면 우리와도 가장 같은 사람들. 어쩌면 촛불 시위의 기원을, 힘을 물려준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가장 그 세월, 그 역사의 제일 위대한 사람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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