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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26. 2021

향신료는 정말 악마의 선물일지도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이나가키 히데히로>를 읽고

 생각해보면 식물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이 만든 인공적인 분위기만이 만연한 도시에서도. 아예 누구도 손대지 않은 천혜의 자연에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생존에 적합한 생물이 아닐까? 아스팔트 사이, 도로 블록 틈새의 민들레와 들꽃을 보다 보면 절로 경이롭다. 우주에서도 살아남기 가장 유리하지 않을까. 두꺼운 시멘트에서도 살아남는데 우주라고 버티지 못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세상이 멸망해도 식물만은 여전히 자리할 것만 같다. 그러니, 그 넘치는 사람의 역사 속에서 식물이 차지하는 자리를 느끼는 건 그리 별난 게 아니다.     


그런 방대한 식물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도통 납득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대체 왜 고추를 ‘red pepper/ hot pepper’라고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명칭이었다. 고추와 후추가 거의 동급으로 표현되다니. 맛 때문인가 생각해봐도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작명이다 싶었는데, 뜻밖에도 콜럼버스가 범인이었을 줄이야. 신대륙이 인도여야 했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으로 만든 거론 모자라서, 고추까지도 후추가 된 거였다! 애당초 후추와 금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가려 했던 모험이다. 그 대상이 없다면 여정이 무의미해질 터. 콜럼버스의 빛나는 재치라고 해야 할지, 무지를 덮는 억지라고 해야 할지.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믿고 죽었다는 건 알지만, 그 여파가 고추에까지 닿았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래야 포르투갈에 할 말이 생겨서일 수도 있다. 인도에 도착해, 후추를 가져오라고 지원해준 것이었으니까. 후추 때문에 신대륙 발견이 일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후추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간다. ‘검은 금’이라고까지 불렸던 후추다. 그 표현이 안 다가올지 몰라도 그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같은 무게의 금과 거래되기도 했으니까. 나는 사실 향신료의 인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향신료를 싫어한다는 게 아니다. 허브, 고추, 마늘, 후추 다 그 풍미가 있어 매력적이니까. 처음 맛봤다면 당연히 홀릴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렇게 국운을 내걸면서까지 임했다는 게 잘 가늠되지 않는다.      


이건 식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일까? 향신료는 주로 고기에 쓰인다. 제육볶음, 불고기, 닭볶음탕, 안동찜닭, 수육까지 향신료가 안 쓰이는 고기 요리를 찾기란 힘들다. 원래 고기 요리가 전통적으로 드물었던 우리나라도 이 정도다. 목축업을 생계로 삼았던 유럽은 더 다양하게 썼을 것이 분명하다. 채소와 달리 특유의 향이 좋지 않은 고기는 향신료에 많이 기댄다. 같은 요리라도 향신료의 종류와 양에 따라 그 풍미가 큰 차이가 난다. 아니면 서양 특유의 유행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후추는 귀족에게 먼저 들어왔다. 귀족이 사랑한 향신료였다. 이 말은, 곧 유럽 전역이 향신료에 목을 맨다는 소리다. 귀족이 누리는 걸 서민들도 누리고 싶어 하는 건 언제나 똑같다. 괜히 짝퉁 명품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먹는 팥 양갱도 고려 귀족의 선지 비슷한, 피 굳힌 간식을 절에서 먹고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다만 서양은 그 유행이 더 강하다. 우리나라나 중국은 귀족이나 양반의 유행이 그렇게까지 큰 인기를 끈 경우가 드물다. 오늘날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고대에서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런 크고 작은 유행을 너무 많이 겪었기에 지금 서양의 유행이 조금은 무의미해진 걸까? 반면 인기와 유행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뒤늦게야 맞은 동양은 아직도 뜨거운 환호를 보내는 건지도 모른다.     

 

고기 위주의 식습관과 귀족의 유행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배경. 이 둘만 해도 향신료가 왜 그토록 주목받았는지 실감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상업을 존중받았던 서양은 파는 품목의 변화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곤 했다. 그러니 향신료 같은 탐나는 제품을 그냥 뒀을 리 있나! 돈을 벌기 위해 향신료에 매달리는 게 흔한 이야기였으리라. 이는 그저 종류가 다를 뿐, 동서양 모두 똑같이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배를 타고 무역하는 수준의 작물인가, 아니면 키울 수 있어 잘 사용하는 작물인가의 차이일 뿐. 서양의 후추처럼 동양에 퍼진 작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를 꼽겠다. 고추가 그 자릴 차지해야 한다.      


솔직히 한국인에게 고추라는 작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 각종 김치, 비빔밥, 고추 장아찌, 각종 찌개, 고추전까지 사용되지 않는 음식 종류가 없다. 명절이든 일상이든 늘 식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음식이 아니더라도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태국 요리에도 베트남의 요리에도 중국의 요리에도 그 존재감은 뚜렷하다. 동양에서 잘 자랄 뿐만 아니라 그 매운맛이 더운 시기에 입맛을 돋우기 때문일까. 저자는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이 내장 신경에 작용해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하고 혈액 순환을 개선하는 유익함이 있다고 했다. 고추의 ‘매운맛’은 사실 미각이 아닌 통각이므로, 통증을 느낀 몸은 그 독성을 중화하려고 기능을 총동원하게 된다. 즉 통각을 느낀 몸이 상태가 비정상이라고 판단해 엔도르핀을 분비하는 것인데, 이는 또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사람은 그 과정에서 매운맛과 도취감, 쾌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고추가 들어가면 해충 번식을 억제하므로 음식을 왜 보관하기에도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추 사랑은 좀 더 유별나다. ‘고추장’이라는 형태 역시 한국에만 존재하니까. 그 배경에는 고려 시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조금 더 많아진 고기 요리에 원인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원래 채소 위주로 먹었던 식단에 고기가 들어오는 건 큰 변화였다. 그러나 향신료를 더 잘 쓰는 동양이었어도 아직 고추 같은 위력을 뽐내는 작물이 없었다. 그러다 고추가 들어왔을 때 고기와 궁합이 참 잘 맞아떨어져 큰 위상을 보이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조금 억지 짐작을 해보자면, 우리나라는 해학의 민족이 아니던가. 괴로움을 승화하는 데 특화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매운맛을 가장 즐기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들어올 때부터 어쩌면 그 매운맛으로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게 하는 데 심취했을지도 모른다. 풍부한 비타민C와 영양분 이전에, 심리적인 효과가 탁월했던 건 아니었을까? 적어도 고추의 입지가 이토록 탄탄해진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이렇게, 향신료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범위를 넓혔다. 냄새 나는 고기도, 빨리 상하는 생선도, 향신료가 있다면 오랫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더구나 그 풍미도 더해준다. 그러니 그 오랜 인기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셈이다. 신이 음식을 만들고, 악마가 향신료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을 기억하는가? 그 말은 아주 뼈저린 말이다. 음식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향신료는 음식보다도 강렬하게 세상을 휩쓸어 바꿨다. 동서양 어디서든 그 흔적이 보인다. 어쩌면 쌀, 밀, 주식인 그 모든 식물보다, 대마초 같은 마약보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식물이 아닐까. 향신료 때문에 일어난 신대륙 발견과 침략을 떠올려 보라. 

향신료는 정말 악마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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