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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pr 30. 2021

색에서 알 수 있다.
허투루 지난 시절은 없다

<그림을 읽는 기술-아키타 마사코 지음>을 읽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뭘까. 나는 확신한다. ‘사람’을 제외하면, 단연코 그림일 것이다. 선과 점, 색깔과 면으로 이루어진 그 물체는 얼마나 알아갈수록 복잡한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그 끝이 안 보일 지경이다. 그림 하나만 두고 본다고 해도 수많은 요소가 함께 딸려오지 않던가. 그림이 그려진 시대, 그때의 분위기와 인식, 색채의 사용, 작가의 도전 혹은 의도, 모델과 화가의 관계성까지 말이다. 심지어 이 요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은 의의가 그림에 담겨있는지 짐작이 가는가? 그 모든 걸 헤아리려면, 정말 제대로 된 공부가 필요하다. 그 모든 과거를 살펴야 하니까. 다행히 이 책에선 그 일부를 소개하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고, 새로운 건 색채에 대한 것이었다.      


색깔. 색채. 색감. ‘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어휘만 봐도 느껴진다. 비슷비슷한 표현임에도, 그 사용이 다양한 걸 보면 관련된 이야기가 오갔음이 훤하니까. 화가가 사용한 물감에 따라 시기를 구분할 정도이니 그 영향은 참 중요하다. 하지만 누가 기억할까. 색깔의 기본은 물감이고 물감은 한때 모두 원석이었다는 걸. 그 당연한 원리는 우리의 색인지에 파동을 일으켰다. 고급스러운 색으로 인식되는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금색)과 하얀색, 검은색은 모두 시대가 만든 이미지다. 과거 원석에서 염료를 만들어야 했을 때 화가들은 약제사처럼 조합하여 물감을 만들어야 했다. 자연히 많은 노고가 들었고, 시행착오가 잦았다. 선명한 색은 표현하기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검은색이나 하얀색이야 드문 게 아니었지만, 깔끔히 물들이기 힘들었다. 서민들은 못 입고, 지배층이 입는 옷이었으니 고급스럽게 보일 수밖에! 노란색은 원래 귀한 색이 아니었지만, 금박 대신 노란색을 금처럼 표현하는 게 유행하면서 ‘비싸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싼 이미지 메이킹을 거친 색채들은 모두 왕족과 귀족, 추기경 등 지배층의 옷에 들어갔다. 주문하는 사람은 자신의 옷이 돋보이길 원한 게 뻔하고, 그리는 화가는 그림의 포인트에 비싼 물감을 쓰길 원했을 테니까. 색깔에 대한 이미지는, 시대가 만들고 당시 모든 사람의 욕구를 충족한 시스템의 산물이다!    

  

물론 그 시스템은 발전으로 무너졌다. '색인지'에 대한 영향만 남긴 채로. 가장 비쌌던 색인 ‘울트라 마린’을 대신해 ‘프러시안 블루’ 등 많은 물감이, 염료가 쏟아져 나왔고 다양한 색감이 화폭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더는 물감이 색 사용에 제한을 둘 수 없었다. 색 사용에 손을 뻗친 건 모순되게도 그때까지 나왔던 그림이었다. 선명한 색, 파란색과 노란색 빨간색과 금색의 조합은 늘 지배층의 색이었기에 물감이 싸진다고 인식이 뒤바뀌진 않았다. 실제로 아직도 우리는 빨간색과 금색, 파란색의 조합을 고급스럽고 비싸게 본다. 아이돌의 의상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너무 오랜 세월 그림에서 나타난 관습은 어느새 이미지와 색을 연결해 버렸다. 그 배경을 뒤로한 채, 그 이미지만이 남아 존재감을 뽐낸다. 요즘 세상은 디지털로 색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아주 미묘한 차이까지도 구별되어, 실로 화려한 색상의 세상이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색이 아무리 다양하고 많이 존재해도 이미지를 바꾸는 건 참 쉽지 않다!

      

나는 색채의 사용이 그저 화가의 생각과 시대상의 관습에만 달렸다고 여겼다. 누가 알았을까, 재료인 물감에서부터 그 관습이 시작되었던걸. 뿌리를 놓치고 있었던 거다. 다행히도 지금은 색채의 사용이 자유로워져 예술가들이 일종의 해방을 맞았지만, 그 이미지의 변화가 언제쯤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아니, 이루어질 수는 있으려나? 색깔에 대한 이미지가 남은 건 정착된 지 오래고, 그걸 바꿀 필요성 역시 잘 느끼지 못한다. 아마 내 손녀 대가 와도 고급스러운 배색은 고급스러운 인상으로 남겠지. 이럴 때면 과거의 깊은 손길을 느낀다. 미래에 무슨 일이 생겨도 변치 않고 존재할 흔적을. 그 옛날을 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이야기들을 보는 건 내 존재가 무의미하지 않음을 성찰하는 순간이다. 만일 내 그림이 이름을 못 얻고 사라진 대도, 내 존재도 그저 활자로 남을지라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내가 사는 사회를 담고 있고 그건 큰 의의가 있을 테니까. 허투루 지나가는 과거는 없고, 무의미한 시절은 없음에 위로를 받는다. 비록 나의 흔적과 시간이 색깔처럼 큰 비중이 아니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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