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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May 11. 2021

이별엔 시간이 필요하다

<몬스터콜스>를 읽고

사람은 언제나 고통을 겪을 때 본모습이 나온다.

그렇기에, 사람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곧 그 사람의 끝을 보여준다.

그 고통은 <몬스터 콜스>의 주인공처럼 주로 이별이다. 특히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별인 경우가 대다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별은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작중 주인공인 코너는 이별이란 고통을 마주한 어린아이다.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이별은 이미 겪었지만, 그때와 달리 엄마라는 큰 보호벽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 외면한다. 그 상황의 스트레스를 받아들이지 못해 방어기제를 펼쳐 엄마의 병환을 낙관적으로만 인식한다. 동시에 상황의 흐름을 보고 미래 예측을 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도 보인다. 다만 자신이 현재의 스트레스에 굴복해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현실적인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못할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놀랍게도 이런 모습은 아주 많이 사실적이다.  

   

코너와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 유사한 경우는 유년 시절 많이들 겪는 법이다. 인생의 첫 이별은 누구에게도 충격이니까. 첫 유치원 등원, 부모님과 따로 자기, 전학, 졸업, 친구와의 다툼, 절교, 그 무엇도 흔한 일이지만, 가볍게 지나는 일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별이라는 고통에 마주하는 것은 인생의 과제이고 나이 관계없이 많은 이들이 해답을 요구하곤 한다.




내게 이별이라면, 기억나는 이별이 있다. 첫 이별은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영화 같은 이별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별. 뜬금없는 이별이었다. 친한 친구도 아니고, 혈연도 아니었다. 심지어 나이도 달랐으니, 이 한국이란 나라에선 참 드문 사이였다. 엄마 친구분의 아들이라는 가벼운 호칭으로 만난 아이는 성별이 다름에도 살갑게 다가와 인상 깊게 남았다. 흔치 않게 ‘바르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 아이는 이제 이름자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굴마저도 흐릿한데, 부고를 들었던 순간만이 떠나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즉사였다고 했다. ‘중학생을 미처 못 본 차가 아이를 치었던 사고’라는 평범한 기사가 딱딱한 몇 자의 글자로 휴대전화 화면에 보였다. 늘 나오곤 했던 ‘사고’가 그렇게 무서운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얼마나 수많은 죽음과 슬픔이 그 뒤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어린 여자애. 수능이 가장 무거운 짐이었던 여자애가 처음 또래의 죽음을 인식한 날이었다. 내 친구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경악만이 몸에 가득해 눈물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충격이었던 날이었다. 엄마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던 첫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고 몰래카메라라도 하는 듯 모든 것이 일상적이라 무서웠다. 그런데도 아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데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앞에 나서는 것이 혹여 가슴에 사무칠까, 장례식에 가지도 못했다. 슬프게도 그 기억은 너무 깊게 남았다. 잊고 있었는데, 내가 외로워지고 문득, 문득 죽음을 생각할 때면 꼭 그 애가 기억이 났다. 집 가는 버스 안에서, 재수학원에서 문제를 풀다가, 밤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너무 서글프면 그 아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떠올랐다.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두고두고 찾아봤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사람이 장례를 치르는 기간은 고인을 보내고 애도할 기간을 주어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이유라고. 이별에 대처하는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기간, 그 기간을 놓쳤던 어린아이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거다.     


코너는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주변 환경의 변화를 느낀다. 그와 함께 자신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와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을 준비할 기간, 이 기간과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의 시간은 코너에게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몬스터의 등장이 코너를 인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코너가 빨리 마음을 잡기를 바랐다. 내가 그 뼈아픈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애도 기간의 중요성이었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사흘, 닷새라 할지라도 온전히 고인을 이별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은 당사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 반면 그 기간을 지나지 못하면 헤맨다는 것. 적어도 ‘나’는. 처음 죽음을 알려준 친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지쳐 잠들 만큼 울다 잠드는 날이었다. 어린 나는 어린 사촌 동생들과 껴안고 울었다. 자기가 TV를 보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자기는 몰랐다고, 엉엉 우는 동생을 달래면 어느새 나도 울고 있었다. ‘운명하셨습니다’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통곡이 가득 채워졌던 병실에서 나는 아빠한테 안겨서 펑펑 울었고, 그 순간을 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되새기면서 울었다. 웃으면 당장 불효자식처럼 될 것만 같았다. 슬퍼야 한다는 의무감, 그 비슷한 감정에 휩싸여 보낸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게 상처를 주진 않았다. 아주 단단히 기억으로 싸여 날 울게 하지 않았다. 물론 어른과 아이, 사고와 병사는 갑작스러움의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 충격의 차이는 컸다. 사람이 이별을 받아들일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하나의 추억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처음 단 한 번만 가능하다. 그게 얼마나 잔인하고 아찔한 문제인지. 그 사실을 모른 채 썩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사람이 떠난다면 그 전에 정리할 감정이 있고, 떠난 후라면 그때 정리할 감정이 있다. 각 상황에 맞는 정리 시기는 존재하고, 사람은 반쯤 본능적으로 그 시기를 안다. 장례식을 치를 때 누구나 하루로 끝내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 보이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장례식의 분위기가 다를지언정 하루로 끝나는 전통은 없다. 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이미 조상들이 검증한 것이다. 하루로는 충분치 않다, 고인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곧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전통처럼. 분명 그 시간이 없으면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안 몇몇 사람이 그걸 정착시킨 것이 아닐까. 애도라는 단어를 정립하기도 전에 말이다. 실제로 그 옛날 구석기에도 장례 문화는 있었으니, 경험의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코너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몬스터가 오지 않았다면 과연 코너가 엄마가 떠나기 전에 상황을 직면할 수 있었을까? 엄마와 인사를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가, 아빠가, 선생님의 노력도 소용없던 상황에서는 불가능했을 테다. 아마 황망한 상태에서 시간을 허무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영원히 코너를 따라다녔겠지. 악몽을 실체화하는 순간이 되었을 테다.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주변의 죽음 이후 악몽을 꾸고, 인생을 어둡게 물들이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보면 몬스터는 몬스터가 아니라 신이나 수호령처럼 보인다. 사람에게 화를 불러올 수도, 복을 불러올 수도 있는 그런 영적인 존재로. 코너가 이별이란 고통을 마주하고 이겨내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 그 전에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하니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몬스터도 3가지 이야기를 해 줄 만큼 오래 살아 어린 코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 것일까? 용사처럼 되지 않도록, 목사처럼 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도록. 그렇게 어린 새싹이 한고비를 넘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일까? 참 무시무시하면서도 듬직한 조력자의 모습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코너처럼 모두가 몬스터를 만날 수는 없다. 대신 몬스터처럼 조력자의 역할을 해주는 존재를 만날 수는 있다. 그 존재는 손위 형제일 수도 있고, 부모님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다. 그들은 장례의 방식을 알려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자책을 막고, 이별에 대해 조언해주며 그 시기를 지나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이별을 회피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 괴로움을 버려두면 더 크기를 불려 덮쳐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덜 괴롭고 덜 힘든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애정을 쏟는 그들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성장한다. 이 도움은 거창해 보이지만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움을 받는 것과 달리 어려운 것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혹여 괜히 아픔을 들쑤실까 염려하고 어떤 것이 최선인지 헤매는 풋내기 어른들은 어른이 처음이라 어린아이의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헤맨다. 물론 아이들의 성향은 제각각이고 각자에게 맞는 최선의 길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별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다 해도 마주하지 않으면 오랜 기간, 어쩌면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가 그 길을 걷도록 하지 않을 테니까. 결국, 방법은 다양하게 고안하되 전해야 할 요점은 똑같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이별하고 누군가는 떠나간다. 우리는 그 이별을 막을 수도 미룰 수도 없다. 그러니 그 이별을 앞두고 있다면 마주하고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혹여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에 힘겹다면, 서서히 마음을 정리해나가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서로가 편하게 놓아주고 마무리하도록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지금 힘든 이별을 하는 모두에게 ‘아름답다’라는 말은 허례허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지나고 보면 알 것이다. 그 순간을 마주하고 지나야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그 편안함은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닌, 개인이 이별을 받아들이고 성장한 증거이다. 그러니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자. 피하면 피할수록 상처는 곪는 법이니까. 자책하지 말자. 우리는 사람일 뿐이다. 이별을 막을 수도, 예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자. 코너의 곁에는 그 고통을 마주하고 이길 수 있도록 도울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의 곁에도 그들은 겉모습만 달라진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힘들면 도움을 받아서 이겨내자. 


이별을 겪은 사람, 겪을 사람 모두가 행복한 평화를 즐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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