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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Jun 01. 2021

가볍게 보고, 무겁게 느꼈다

<조선에놀러 간고양이-아녕>을읽고

  고양이와 역사가 합쳐졌다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단순하고도 빠른 결론으로 그 책은 내 손에 들어왔다. 고양이 일러스트가 주된 볼거리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내용은 생각지도 못하게 알찼다. 나는 그 많은 제사를 지내면서도 왜 그 순서에 이유를 몰랐을까? 갖바치란 직업은 알면서도 왜 그들의 직업 선택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물놀이의 의미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말이 되는가? 수많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충격이 그러하듯, 굳이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솔직해져 보자. 우리나라의 역사를 모른다고 쳐도 홍동백서 네 글자를 모르면 놀라지 않던가. 교과서에나 나오는 위인들의 이름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삶에도 남아 있는 요소를 모른다는 점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제사를 지낼 때 상차림은 정해져 있어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뭔가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더 효율적으로, 더 아름답게 차릴 이유가 없으니까. 위패를 놓고 병풍을 펼치면서도 제사상 차림에 대해 몰랐다니 참…. 위패와 병풍을 조상님의 자리로 하여 밥과 국을 가장 가까이 두고, 그다음에 반찬을, 제일 먼 곳에 후식을 둔다는 단순한 구조가 그렇게 확 들어오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예전엔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 상차림을 차리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갑자기 제사상 차림에 능숙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홍동백서 이외에 세밀한 건 모른다. 그럼에도 그 법칙을 알기 전과 후의 제사상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왜 상차림이 그렇게 펼쳐지는지 이유를 알았다고나 할까?     


물론 책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들이 다 이렇게 숨어있는 단순함은 아니었다. 사물놀이와 갖바치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로 제대로 ‘배워야’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사물놀이가 왜 농악의 요소였는가? 거문고, 비파, 해금, 가야금 그 많은 악기는 어쩌고? 생각보다 그 해답은 단순했다. 하기야 앞서 말한 악기는 모두 앉아 연주해야 하는 것들이다. 점잖고 풍류를 읊을 때면 모를까 모든 일을 끝내거나,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이거나 할 때에는 알맞지 않았다. 그렇게 선택된 꽹과리, 장구, 북, 징은 철학적 의미를 담기도 했다. 꽹과리 소리는 천둥과 번개, 장구는 빗물 소리, 북소리는 구름과 땅, 징 소리는 바람을 의미했던 것이다. 농사를 도와주는 자연현상을 악기 소리로 표현한 셈이다. 이 사실이 그다지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게 아쉽다. 만약 조금 더 널리 퍼지고, 다들 배우고 아는 내용이 된다면 사물놀이란 장르를 받아들이기 더 쉬울 텐데. 마냥 전통적이고 흥겨운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면 그 존재 의의를 더 잘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원망이 치솟는다. 이런 걸 학교에서 알려주면 얼마나 재미있게 학습했을까!     


갖바치 이야기도 그렇다. 신을 만드는 일이니 뭐 특별한 게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볍게 볼 게 아니었다. 물론 갖바치는 백정, 승려, 무당 등과 함께 신량역천에 속해 있는, 법적인 신분이 양인이지만 종사하는 직역이 천시되는 경우였다. 차별과 멸시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거란족의 후예였다. 고려 초기 유목민인 거란족과의 전쟁이 잦았는데 그때 포로가 되어 잔류한 사람 중 조선시대까지도 무리를 이룬 이가 많았던 것이다. 왕조는 그들을 농민으로 전업시키고 싶었지만 그들은 조상의 유업을 잊지 못했다. 가축과 관련된 직업을 고집하였고, 그중 일부가 갖바치로 일했다. 조선 전기부터는 가죽신에 대한 수요가 높아져 직업을 버리기 더욱 어려워졌다. 수요가 있으니 뭐하러 하던 일을 뿌리치고 농업에 힘쓰려고 하겠는가. 당연한 이야기다. 19세기 말 이주해온 중국인과 그 후손이 오랫동안 중국 식당을 경영했듯이 고려 초에 귀화한 거란인과 그 후손도 갖바치로 조선사회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귀화 외국인의 조상이요, 변하지 않는 사회화의 모습 같기도 하여 씁쓸하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잘 흡수되어 사는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닌 그들의 모습이라. 세상이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어째 사람이란 존재는 변하지가 않는다. 세상이 변하는데 사람은 그대로인 게… 예전에는 낭만적이라고 여겼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그저 입맛이 쓸 뿐이다.   

  

이렇게 많은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제일 충격받은 건 해제를 해주신 김종성 저자의 말이었다. 역사 속 그림을 고양이로 대체함으로써 선입견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은 별 수 없이 그려진 사람의 이미지로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동물로 그리면 그런 걸 최대한 막을 수 있다는 게 참 새로웠다. 우리의 역사를 다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회라니. 마냥 생각 없이 나온 시도였을지 몰라도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나는 원체 의미 부여를 좋아한다. 상징에 나만큼 목을 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 테다. 생각해보라. 숨겨진 이야기, 숨겨진 이유는 언제나 재밌다! 남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지식, 흥미로운 이유와 결과, 그 모든 것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때로 내 인생에 큰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다. 숨겨진 보물을 파헤치며 읽는 기분이었다. 하여, 그런 마음으로 추천한다. 부디 내가 느낀 행복을 누려보길 바란다. 얕본 책에서 충격받는 경험은 아주 재미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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