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이힐에서 내려와도 괜찮네

다시 한번 감사하며 살기로 했다.

by 루나케이

20살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임신 전까지 그러니까 약 20년간 나는 하이 힐만 신었다. 화장은 안 해도 힐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체육대회나 등산 같은 행사는 예외이긴 했지만, 나의 일상을 기억하는 이들은 나는 실험대 앞에서도 힐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이라고 했다. 하이힐의 시작은 일상의 불편함 때문이었다. 약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키가 작은 내게는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게 좀 창피했다. 우연히 구두가게에 들러 맘에 드는 힐을 발견한 첫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렸다.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군가의 머리 가르마도 보게 되고, 팔꿈치를 접어 손잡이를 여유 있게 잡으니까 낑낑거리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정말 나는 내 키가 그만큼 큰 줄 알고 약 20년을 살았던 것이다.


발이 아픈 것도 그 당시에는 젊어서 그랬는지 별 기억이 없고 나이가 들어서는 오래 신어서 익숙해졌는지 오히려 운동화가 불편할 정도였다. 영원할 줄 알았다. 출산을 해도 나는 하이힐을 벗지 않을 거라 자신했었다. 배가 불러오던 때, 잠시 몇 달간 안전을 위해 운동화와 타협한 것이라고 난 믿었다. 출산 이후 엄마에게 찾아오는 탈피 비슷한 증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탈모였다. 진짜 의학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임신기 호르몬의 변화로 일정하게 빠져야 하는 머리카락이 안 빠지고, 출산 이후 호르몬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기에 갑자기 한꺼번에 머리카락이 빠지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꺼번에 빠지는 양은 어마어마했고, 채워지는 속도는 엄청 더디었다.


정수리 쪽을 가리기 위해 뒷머리를 끌어다 놓고, 한여름에 벙거지를 눌러쓰고, 야속하게 배는 그 자리에 그대로여서 바지는 못 입고 치마를 입을 수밖에 없는데, 힐은 커녕 구두처럼 생긴 것들은 아예 신을 수가 없었다. 아직 뼈마디가 자리를 잡지 못해서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사실은 아직 힘든 시기였다. 이 시기에 외출은 죽기보다 싫었다. 사실 외출이라기보다 아기 예방접종이나, 나의 탈모 처방을 위한 병원 가는 게 고작인데, 세상에 이러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바지 버튼이 잠기기라도 하면 바지라고 입겠는데, 뱃살 가려보겠다고 원피스를 꺼내 입으니, 배는 더 볼록해 보이고, 신발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내 자존심이 반쯤 접힌 기분이라고 할까.. 뭘 어떻게 해도 누가 봐도 막 출산한 보기 안쓰러운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 와중에 가장 푹신하고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를 찾았다. 혹시 내 걸음이 편하지 못해서 내게 매달려 있는 아기가 불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슴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기가 온 세상과 나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현관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좀 전까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울퉁불퉁 튀어나온 뱃살과, 벙거지 사이로 희끗한 새치며, 구겨진 운동화 뒤로 부기 덜 빠진 발이 반쯤 걸쳐진 내 눈을 감고 싶은 그런 모습이었는데, 내 미소가 너무 환하다. 세상에 이렇게 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니... 아기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거울 속 나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세상을 다 가지면 이렇게 온화해 질까? 살면서 이렇게 진정성 있는 행복 가득한 미소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참 대견했다. 이 아기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세월 동안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공항 택시 안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느끼는 편안함 정도가 내가 가끔씩 행복하다고 기억하는 정도였다. 가장 긴 기간 동안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가슴 벅찼다.


뾰족 뾰족 모난 성격으로 버티고 견뎌온 지난 시간처럼 내 하이힐은 사실은 아주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혹여나 부러지면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아플 테니까.. 아침마다 힐을 신으면서 구두굽이 괜찮은지 제일 먼저 확인하거나, 혹시나 부러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출근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높을 것 같던 내 하이힐은 어쩌면 갑자기 추락할지 모르는 내 자존심과 꼭 닮았었다. 그래서 더 방어적이었던 것 같다.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위태롭지만 넘어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도 관심 없는 내 하이힐에 난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지난 시간 살아왔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내 배에게 아기가 30분 만에 빠져나간 것처럼 난 힐에서 내려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사실 힐은 없어져 버렸다. 모르겠다. 내가 버렸는지, 누가 버렸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다. 난 이제 하이힐이 필요 없으니까. 10달 만에 바뀐 내 몸처럼, 내 자존심도 서서히 탄탄한 자존감으로 함께 바뀌어 갔던 것 같다. 운동화를 다시 펴서 가지런히 바로 신는다. 좀 더 편한 자세로. 평평한 바닥처럼 내 발아래 세상 전체를 다 감싸 안듯 어떤 시련도 어려움도 한발 한발 이 아기와 같이 내 딛으려 한다. 지금의 나를 다시 살게 해 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하이힐과의 작별도 스니커즈와의 새로운 만남도 이유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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