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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케이 May 06. 2022

쌓이면 보이게 될까요?

그냥 쌓는 게 아니다. 진심이 쌓여야 한다.

-너... 혹시 하고 싶은 게 있니? 가장 하고 싶었던 게 있으면 한 번 생각해볼래?


30대의 절반을 세무사가 되기 위해 매달렸던 남동생은 2년 간격으로 1차 합격의 맛만 보다 결국 2차까지 합격을 끝내 하지 못했다. 펀드 매니저로 사회 첫발을 디딘 동생은 한동안 꽤 잘 나갔었다. 단시간 합격을 위해 직장도 관두고 몰빵 했고, 미래를 약속한 여자 친구도 그렇게 남동생만 바라보았다. 5년이라는 시간은 모두에게 가혹했고 지치기에 충분했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던 이 막은 아주 잔인하게 내려졌다. 여자 친구도 마치 전염병이 옮을까 봐 두려워 망치듯 사라졌다. 그해 가을은 잔인했다. 나는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1도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그런 게 인생이니까.. 흘러가게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냥.. 한 번쯤 남동생이 인생을 즐겼으면 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저 하루가 버려지는 게 아닌, 어제가 오늘 같지 않게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는 삶에서 힘을 얻기를 바랐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렇게 흘려보내버리기에 아직 남은 30대는 좀  더 치열해야 하니까... 슬프고 아프고 억울그런 감정까지  않았다. 그 마음들은 미 많이  사람, 저 사람에게 쓸려서 상처 투성이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내가 있는 싱가포르로 오겠다고 했다. 처음에 일주일 계획이었지만, 길어졌다. 한 2주 정도 머물다 떠나기 며칠 전 저녁을 같이 했다.


- 나 일본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있는데..

차라리 나사 가서 로켓을 쏘겠다는 말이 덜 당황했을 것 같다. 있어라도 보이지. 뭐래는 거야?

-일... 본? 뭔 공부? 언제부터 생각했다고? 너 일어도 하나도 못하잖아.. 영어가 더 낫지 않나?   


뒤엉킨 머릿속에서 막 화가 나려고 했다. 배신이 이런 건가? 그동안 지원해준 돈도 아까워 죽겠는데도 말도 못 하고 있는 나한테, 고작 한다는 말이 뭐?? 일본이라니.. 한참을 고개 숙여 있다가 나는 겨우 이성을 찾았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데..

-나.. 패션디자인 학교 가고 싶어.. 엄마 말대로 당장 동대문 가서 옷 가져다 팔 수도 있는데,  목표가 없잖아. 결국 기술이 없으면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또 누군가에게 의지 해야 하고.. 그래서 직접 옷 만드는 기술 배워서 내 브랜드로 된 옷 만들고 싶어.. 해 보고 싶어

 

남동생에게 패션은 그렇게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세무사 한다고 했을 때, 모두 의아해했었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고,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날카로웠고,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남동생은 패션 감각이 제법 있었다. 은연중에 던지던 말이 진심이었던 것이다. 난 일단 외국생활에 찬성했다. 그렇게 막연한 외국생활의 기대는 한 달 만에 싹 사라지고 현실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부딪혀봐야 아는 것도 있다.


틀렸다. 내가 사람을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3개월의 연수 생활은  남은 기간 악바리 근성의 밑바탕이 되어 1년 만에 일본어 시험 동시 차 합격을 시작으로 다음 해 패션학교 2곳 동시 합격까지 이어졌다. 나이 40에 20살  동기들과 2년간의 치열한 일본 대학 생활은 동생에게 새로운 길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고, 다 실패한 인생처럼 나는 생각했었는데, 동생이라는 이유로 난 그렇게 남의 인생을 내 맘대로 재단했었다.. 결국 동생은 우여곡절 끝에 졸업이라는 하나의 마침표를 그렇게 돌아 돌아 찍었다. 동생이 정말 대견했다. 아주 아주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었기 때문에 다들 포기하는데, 그렇게 묵묵히 가더니 출발점에 다시 섰다. 앞만 보고 걸어가며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동생인생기도해주고 응원하기로 했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모르지만,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길을 소신을 가지고 걸어간다는 거.. 그 시작에 발을 딛는다는 거..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는 안다. 지금 내가 몇 편의 글쓰기로 작가가 되어 보겠다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를까.. 동생은 몇 달 전부터 네이버  스토어를 운영하며 누군가의 옷을 가져다 파는 일을 시작했다.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상한 이미지 작품도 같이 올리는 것이다. 차라리 옷 사진이나 더 찍어서 보여주지 뭐하나 싶었다.

옷이 가지는 이미지를 담아낸 컨셉 작품[havehope]

쓸데없는 짓을 하는 동생이 못 마땅하고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아서  남의 옷 가져다 팔면서 너무 많은 에너지 쏟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빗대어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매주 하나씩 주말마다 옷 촬영을 마치고 옷 콘셉트 작품 만드는 일로 하루를 꼬박 새우면서 매주 월요일 하나씩 업로드가 되었다. 그게 벌써 17개가 되었다. 14번째 콘셉트 작품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어떤 옷일지 상상하며 스크롤을 내려 보니, 그 이미지가 딱 맞아떨어졌다. 매까지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사게 되었다. 나한테 맞지도 않는 옷을 그렇게 콘셉트 이미지에 홀려서 샀다.


얼마나 고민하고 고민해서 만들어낸 콘셉트 이미지 인지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져 가는 이 콘셉트 작품이 쌓여가는 것을 보니 고민의 흔적과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명 남짓 리뷰가 있거나 아예 안 팔리는 옷들도 꽤 되는데, 동생은 그렇게 묵묵히 자기 길을 가면서 나아가고 있었고, 분명히 쌓여가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 그리는 미래, 자신이 누구인지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 지금 이게 별아닌 거 같지? 이게 곧 20개 30개.. 그렇게 100개가 되면 그게 바로 나인 거야.. 내 브랜드인 거지.. 난 그게 하고 싶었어.. 누나가 그걸 알아봐 줬네.. 생각보다 빠른데? 난 그렇게 가는 지금이 좋아"


진심. 또 한 번 동생을 과소평가했다. 부끄러웠다. 글 전전긍긍하던 내가 진정 나를 표현하려 했었는지.. 이제야 내가 왜 글을 쓰는지, 쓰고 싶은지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 진심도 쌓여가고 있는지.. 정말 쌓으면 보이게 될까? 누군가에게 나를 알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알게 되는 것일까? 내 진심이 먼저 글에 닿아야 한다. 나도 그 길을 가 보려 한다. 오늘도 이렇게 한 편의 글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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