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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케이 May 11. 2022

내가 나를 위로해 주기로 했다.

내 방식대로 괜찮아지면 된다. 

모닝콜이 울리면 우선 머리부터 깨워 활자를 이미지화한다. 아니면 5분 간격으로 알림을 맞춰야 한다... 이거 최악의 경우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5분만.. 5분만.. 5.. 분.. 만..


새벽 6시 30분 알림 제목: 아들 예방 접종! 이미지를 만든다. 지금 일어나서, 아들 깨워 보리차 마시게 하고, 설거지통 마른 그릇들 정리하고, 신랑 도시락 챙기고, 이유식 데우고, 아들 먹이고... 이렇게만 해도 1시간 이상 소요되니까... 씻고 준비까지 하면... 아.. 씨 지금 바로 일어나야 병원 접수하고 겨우 출근 가능하겠네.. 머릿속에 동선을 이미지화하면 5분만 거릴 여유가 없다. 바로 눈이 떠진다. 그래 봤자, 세수 겨우 하고, 운동복 레깅스에 재킷 입고 광 스피드로 밟아도 접수번호 3등.. 지독하게 이기고 싶은데... 이까짓게 뭔데, 좀 져주시지.. 오늘은 내가 1번이면 다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냥 화가 난다. 이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아서... 


예방접종 알림 문자는 아들이 사회에 나갈 준비를 알리는 소식 같아 마냥 기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과 싸워낼 힘조차 없는 아기를 보호하는 건 엄마가 아니라 주사인 것만 같아 또 아프다. 행여 놓치면, 아들의 인생이 뒤로 밀리는 것만 같아 엄마가 이것 만큼은 제일 처음으로 해주고 싶은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너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데.. 주사를 두려워하는 긴 시간 보다, 맞서서 이겨내는 순간을 함께하고, 저 어깨 넘어 너의 세상을 살아갈 시간을 더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담아 아들에게 보내는 날이다. 비록 3등이었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남편의 전화가 왔다. 겨리 주사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오늘 학부생 실험 가르쳐주기로 해서 같이 저녁 먹고 9시쯤 퇴근할 것 같아. 내 저녁은 하지 마

-오케이! 알겠어..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사전에 알림도 없이 당일 일정을 통보하는 이 처사에 어떤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예방주사에도 나는 이렇게 내 인생의 일부를 같이 녹여서 살고 있는데 방식은 달라도 같은 걸음을 내 딛일 순 없는 걸까... 큰 맥락에서 보면 비틀거리지만 같은 곳을 향해 잘 살아내고 있다고 서로 다독이고 추슬러 가고 있다 생각했다. 오늘은 그런데 화가 난다. 자꾸만 화가 난다...


출근길 내내 정리 안된 머릿속이 앞을 흐리게 하더니 결국 차를 세웠다... 왜 화가 나는 건지..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하면 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힐지 생각해도 모르겠다. 차를 몰아 KTX역으로 갔다. 가장 가까운 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어제까지 내 인생에 없던 이곳이,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하루가 아니라 내가 주변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인생에 들어간 것 같은 이 야릇한 기분 참 좋다.. 혼자 떠나는 시간과 공간과 생각들이 낯설어서 새롭고, 설레어서 반갑다. 괜스레 눈인사도 해보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도 한번 쓸어내려보고, 모두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한번 해볼까? 마음먹고 고개 저어도 보고.. 피식피식 이런 내가 좋다. 짧은 열차 시간은 멀지 않은 편안함을 주고, 같은 일상인 듯하면서도 내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없어서 더욱 좋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곳은 예전 직장이 있는 지역... 역에서 지하철로 30여분 이상 가면 닿는다... 기차 타고 온 곳이 고작 여기다.. 2년 전 일주일에 5일 이상 출퇴근하던 내 일상이었던 여기가 오늘 왜 이렇게 나를 들뜨게 하는지 모르겠다... 매일같이 지하철과 기차를 오가며 투덜거리고, 피곤해서 짜증에 차서 사람들을 밀쳐내며 달리던 내가 갑자기 보였다.  


그리운 건가? 돌아가고 싶은 건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플랫폼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기운이 차 올랐다. 열정만 있던 시절의 나는 활기차면서 밝았고,  늘 힘들어하던 동료들을 위로해 주었고, 역에서 뜨거운 가락국수를 먹으면서 살아있음을 느꼈었다. 내가 가면 된다. 내가 하면 된다. 내가 나를 위로해 주면 된다. 이렇게 잠시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고 알아봐 주고 감싸주면 된다. 그렇게 어려울 것도 힘들 것도 아니다.   


절대적 잘못으로 보이는 다툼도 그 내면에는 작은 불씨가 있고, 누군가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상대는 전혀 모르는 내 마음을 알아봐 주지 못해서 화가 난다고 뭘 어쩌라는 거지? 상대가 뭔가 해주길 뚜렷이 바라는 것도 없다. 나는 내 불씨인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불씨는 내가 꺼야 하는 게 맞다. 잘 풀어주면 될 일이다. 내가 풀려야 다음을 풀 수 있다. 내가 꼬인 채로 상대를 바라보면 뭘 해도 봐 줄 수가 없다. 남편의 밑도 끝도 없는 미안하다는 사과가 더 화나게 만드는 이유다. 나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쌓이다 넘쳐서 꼬인 마음이 내 마음인 채 살아온 것이다. 


오늘 몇 대의 기차가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헤아리다 생각의 끝에 나는 자리를 일어섰다. 이제 내 삶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마지막 기차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차.. 이 역의 마지막 기차를 타고 다니던 2년 전의 내가 아니라, 지금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기차... 이걸 타고 가면 다음 시간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자리에 앉아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나는 이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잊고 살고 있었던 시간이지만, 잊힌 건 아니었다. 내 인생의 시간이 고스란히 이 역에 남아서 살아있었다. 너무 빨라서 모르고 지냈던 지난 시간을 오늘 다시 들어야 볼 수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허무한 게 아니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서 허한 것이다. 생각을 끄집어내어 보니, 나는 살아있고, 그 바탕에 지금의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살아내 온 지난 시간의 결과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음을 그렇게 잘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위로를 해 주기로 했다. 다시 잘 풀어진 삶을 대하면서 이곳의 인생도 언젠가 나를 또 위로하는 한 장면이 되길 바라며, 나를 감싸안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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