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움...
그렇게 잊어 보려고 해도 잔상이 남아 계속 맴돌던 사람이, 어느 날 내가 기억하지도 않고 살고 있었구나 했는데, 전혀 예상 못한 어느 날 그는 무례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나의 일상을 깼다.
" 학생 때 받았던 필기노트들 돌려주고 싶은데 언제 시간 될 때 한번 봐"
작년 여름 미친년처럼 그를 찾아 용서를 구하려 했던 시간과 그렇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틀뒤 읽십이었다가.. 도대체 마음을 알 수 없던 그는 자기를 그냥 내버려 둬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지난 8월, 지도교수님 은퇴식 의논차 뵙게 된 자리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나랑 같이 일하는 아직 미혼인 연구실 후배에게 과선배를 소개해 주시겠다면 나온 이름.. 내 전 남자 친구.. 그였다. 둘 다 내 대학 후배였다.
설마 설마 하며, 재차 이름을 물었는데, 맞았다. 전문의를 달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이렇게 우리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용기를 냈다.
1년 만에 다시 문자를 했다. 전문의 달았다는 소식 전해 들었다고, 축하한다고.. 이제 정말 잘 살기를 바란다고.. 한참 뒤 답이 왔다.
" 걱정 마, 교수님 만나도 너 이야기, 아니 우린 사귄 이야기 하지 않을 거니까"
갑자기 내가 정말 쓰레기가 된 것 같았다. 정말 진심이 진심으로 통하지 않는 게 이런 거구나.. 이젠 정말 그만해야겠구나.. 용서도 이제 그만하면 된 것 같다 싶어서 그날 이후 난 마지막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 지웠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어깨에는 노트북 가방, 한 손에는 핸드폰과 차키 그리고 다른 손은 커피까지 겨우 사무실 문을 열고 조심스레 물건들은 내려놓다 문자를 봤다. 커피를 쏟았다.
이유가 뭐가 되었던 상관없다. 만나자고 했다. 그의 문자가 꽤 편해 보였다. 내 것을 돌려준다고 했다. 나도 그의 상처 투성이 마음을 다시 따뜻함으로 돌려주고 싶다. 이제 나를 놓아주기로 한 것 같다.
마지막까지 나와 싸우고 있던 그가 안쓰러웠고,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그냥 내 갈길을 가라던 그가 이제 다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의 진심을 내 방식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아서 물었다.
" 왜 갑자기 그 물건들을 돌려준다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너의 심경의 변화가 너에게 좋은 방향이길 바랄게"
"책꽂이에 있는 거 볼 때마다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였다. 담담하면서 따뜻한 사람.. 내가 만났던 그 사람, 내가 알던 그 사람.. 나를 참 많이 사랑했던 사람..
그의 마음을 이제 정말 알 것 같았다. 그랬구나.. 어느 한 구석에 내버려 두지도 못하고 보면서 아파하고 기억하고 마지막까지 나를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구나.. 이제 나한테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뭘 그에게 줬었는지.. 또 미안했다. 그는 역시 나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다.
우린 언젠가 시간 날 때 만나자고 했다. 이제 곧 나의 이별이 끝나가려 하는 지금,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이별이 더 이상 그립지 않도록 매일매일 준비하려고 한다. 곧 있을 나의 이별이 끝나면 나도 그를 이제 그리워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난 사랑으로..
*전지적 이별 시점 이후 제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