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릭 May 24. 2021

겨우 문턱만 넘어봤을지라도

겁 많고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

오늘은 나같이 겁 많고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 내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무언가를 해낸 이야기가 아니라 겨우 문턱만 넘어본 이야기다.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시도만 하고 끝난 이야기. 누군가에겐 ‘에게, 이게 뭐야?’라고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 그래서 적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지만, 대단한 일이 아닌 별거 아닌 일을 적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에 결국, 적어본다.


예전부터 운동 중에 복싱을 배워보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어딘가 멋져 보였다. 그동안 헬스, 수영, 배드민턴, 필라테스는 해봤지만 복싱은 생각만 하고 막상 복싱장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서 경험해본 적 없는 운동을 배운다는 건 나에게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동네 복싱클럽이 “월 5만 원” 이벤트를 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됐다. 며칠간 고민하다가 요즘 집에서 하는 운동도 깨작깨작하게 되어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전 11시쯤 집에서 나와서 약 10분 정도 걸어가니, 복싱장이 있는 건물이 나왔다. 복싱장은 6층이었는데 하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게 아닌가. 괜히 올라갔다가 닫았으면 고생이니까 전화부터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직 오픈하기 전인가, 다음에 올까 싶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올라가 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6층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고민하다가 비장하게(?) 마음먹고 다시 올라갔다.




필라테스를 등록하러 갈 때는 이렇게까지 긴장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필라테스는 한 군데를 등록하기 전에 여러 곳을 알아보고 등록하고 싶어서 무려 세 군데를 직접 가서 상담받고 결정했는데, 이상하게 복싱장에 들어가는 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복싱장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문을 닫은 게 아니었고 헛걸음은 하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치 무대공포증처럼 내가 들어가면 복싱장에 있는 사람들이 나만 쳐다볼 거 같은 긴장감이 나를 휘감았다. 이게 뭐라고 무섭고 겁이 났다. 순간 다음에 다시 올까 고민했다. 누군가 같이 와주면 수월하게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이대로 뒤돌아서 집에 간다면, 나는 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겠다고 느꼈다. 조금 어렵다고 느끼면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계속 누군가를 의지하겠구나 싶었다. 뭔가 모를 이 두려움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야 했다. 나를 한심하게 여길 게 아니라 그냥 이 문턱을 넘어보면 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땐 진지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문이 열려있는 복싱장 입구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코치를 받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속으로는 긴장했지만 밝은 목소리로 코치님께 인사했다. 코치님은 처음 오셨냐고 물으면서 조금 있으면 수업이 끝나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말씀해주셨다. 운동하시는 분들은 자기 운동하기에도 바빠서 나를 보지도 않았다. 나한테 이목이 집중될 것 같은 부담은 괜한 걱정이었다. 




수업은 금방 끝났고 상담을 받았다. 월 5만 원 이벤트를 아직 하냐고 묻자, 아직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1년을 등록해야 월 5만 원이 적용된다고 하셨다. 그럼 한 번에 60만 원을 내야 한다는 건데. 한 달만 등록하면 얼마냐고 묻자, 15만 원이라고 하셨다. 5만 원에서 세 배나 껑충 뛴 금액. 그럼 그렇지, 이렇게 가격이 쌀 리가 없었다. 광고에 속은 기분이었다. 백수인 나에겐 부담되는 금액이었다.


코치님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어보셔서 고민해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저한텐 엄청 용기 낸 거라며 웃으면서 말씀드렸다. 큰 과제를 끝낸 마냥, 개운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왔다. 정확한 금액을 알고 지금 내 상황에서는 힘들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마 상담을 받지 않았다면 <월 5만 원 이벤트>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미련이 남지 않았을까 싶다. 이벤트가 끝나기 전에 등록을 했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마치 여우가 포도를 따 먹지 못했을 때,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하고 돌아갔던 것처럼, 복싱을 할 수 없는 적당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자기 합리화를 했을 것이고 복싱장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미지의 세계였던 복싱장의 문턱을 넘고, 상담도 받으면서 내 상황에 맞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고 그때가 되어서도 복싱이 배우고 싶다면, 찾아가자고 생각했고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겁이 많고 소심한 내 모습을 이야기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별거 아닌 일을 글로 적어보았다. 제대로 된 시작을 못하고 겨우 문턱만 넘어봤다고 울상을 지을 필요가 전혀 없다. 그 행동은 충분히 멋지고 잘한 일이다. 막상 해보면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일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차가운 바닷물에 발만 살짝 담그고 뺐을지라도, 그것을 한 것과 안 한 것은 천지차이다. 그러니, 심호흡을 가다듬고 문턱이라도 넘어보는 건 어떨까. 








커버이미지는 Pixabay로부터 입수된 Pete Linforth님의 이미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생일이 되면 우울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