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식어버리는 열정
초등학생 1학년 때였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릴 때였나. 피아노 학원에 다녔었다. 친오빠도 같이 피아노를 배웠는데 오빠는 피아노 선생님께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었고 나는 딱히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없다. 흥미도 크게 없었다. 그러다가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계기가 있었는데, 중학생 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고 나서였다. (작품 속 피아노 배틀 영상을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상륜(주걸륜)은 피아노 천재로 등장하는데 샤오위(계륜미)를 만나면서 사랑의 감정을 키워간다. 그 둘의 로맨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볼 만큼, 절절한 마음이 들었고 동시에 피아노를 멋지게 치는 모습도 뇌리에 박혀서 ‘저 주제곡은 꼭 치고 말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다. 계속 한 곡만 반복해서 치다 보니, 그 곡은 악보를 보지 않고 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새롭게 무언가를 배우기 좋아하고 즐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서 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주 1회 레슨이었는데 한 4개월 정도 했던가. 고등학생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점점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흥미를 잃었다.
레슨을 받고 나면 주중에 연습해야 실력이 느는데, 연습해서 가는 날보다 안 해가는 날이 더 많아지니까 실력은 제자리였고 재미가 없었다. 선생님이 시범으로 보여주시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느꼈는데 정작 내가 연주할 때는 ‘끽끽’ 거리는 거친 소리가 듣기 싫었다. 목이랑 어깨도 너무 아팠다. 오늘은 바빠서 시간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면서 서서히 레슨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비슷한 시기에 수영도 배웠다. 아빠는 평소에도 물에 빠지면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수영은 꼭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 수영을 배우다가 그만뒀는데 꽤 오랫동안 쉬다가 스무 살이 되어 동네 친구랑 같이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초급반에 들어가서 ‘음파, 음파’ 호흡하는 법부터 시작했다. 친구랑 같이 수영을 배우니까 재밌었다. 힘껏 발차기를 하면 시원하게 물보라가 일어나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친구의 학교 일정이 바빠지면서 점점 수영에 혼자 가는 날이 많아졌다. 수업 초반에는 아주머니, 언니들도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재등록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나를 포함해서 여자가 별로 없고 아저씨들만 남았다. 수영장 레인 50m를 자유형으로 혹은 배영으로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몇 바퀴 돌아야 하는데 늘 중간에 숨이 차서 헉헉댔다. 나보다 체력이 좋은 아저씨들은 물살을 가르며 뒤처지는 나를 다 앞서가셨다.
배운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접영을 배우게 되었다. (접영은 수영 영법의 마지막 단계다) 강사님이 수업 진도를 빨리 빼신 건지, 아니면 내가 익히는 속도가 느려서 그랬는지 점점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게다가 초급반인데 갑자기 실력자 두 명이 들어와서 기가 죽었다. ‘저분들은 중급반이나 상급반을 가야 하지 않나’하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불편한 마음이 커졌고 결국 수영도 그만뒀다.
시작할 땐 열정을 가지고 패기 넘치게 시작했는데 힘들거나 싫증이 나거나 어떤 이유로든 한계를 만나면 끈기 있게 버텨내지 못했다. 팔팔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냄비 같았다. 당장 눈으로 발전하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몸은 굼뜬데 마음은 조급했다. 그래서인지 전 직장을 다닐 때,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차분하게 먹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도 이런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사람이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뚝심 있게 지속하고 추진력 있게 앞으로 나가고 싶지만 얼마 못 가서 한계를 느낀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단기간에 성취하려는 욕심이 많았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내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더 큰 것을 바랐다.
그러다 보니 조금 발만 담가보고 안 될 거 같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그래서 늘 새로운 자극을 원했다. 책을 읽더라도 한 권을 끝까지 못 읽고 이거 찔끔, 저거 찔끔 읽었다. 그렇게 읽는 게 나만의 독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집중력이 부족해서 그랬다. 조금 읽다가 재미없으면 말고 그런 식이었으니까.
하루하루는 반복된다. 어제와 오늘의 하루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반복되는 패턴은 같다. 하루 24시간에서 8시간 정도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쉼을 갖는다. 그 안에 새로운 일이 생겨도 일상이 되면 익숙해진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이 늘 새로울 수는 없다.
이전에는 막연하게 높은 곳을 바라보며 구름 위를 떠다녔다면, 이제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내 수준을 인정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차곡차곡 쌓아가려고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서 내가 하는 일이 초라하게 느껴질 땐 심호흡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 좀 더 천천히 걸어가 보자. 꼭 결과물이 생산적이지 않더라도 즐겁고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익숙하지만 낯선 느낌으로 집에 구석진 곳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친 게 10년도 넘어서 왼손 계이름은 다 까먹었다. 대단한 곡을 치고 싶다는 마음보다 ‘오랜만에 다시 한번 쳐볼까?’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앉았다. 건반을 딩동 거리며 새롭고 낯선 느낌에 즐거웠다. 분명 익숙한 건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날 수도 있겠지만 이 마음이 가늘고 길게 유지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