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무모할지라도
당신의 여행 스타일은 어떠한가?
아마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것이다. A~Z까지 꼼꼼하게 계획해서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목적지만 대충 정해놓고 즉흥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꼼꼼하게 계획을 짜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즉흥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국내 여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일주일 전에 날짜와 숙소를 예약하려는 편이고 어느 정도 틀은 정해놓고 여행을 시작해야 마음이 편하다. 동행자가 있는 여행이라면 서로 가능한 날짜를 함께 맞춰야 하므로, 기간의 여유를 훨씬 더 넉넉하게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내가 친구와 즉흥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것도 바로 전날 밤에 숙소와 버스를 예약하고.
때는 7월 초여름 날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은 하도 스팸이 많아서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데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받으니 지난주에 지원한 회사였다. 내 이름이 맞는지 물으면서 아직 구직 중이냐고 하셨다. 그렇다고 하니, 다음날 오전 열 시에 면접을 보러 오라 하셨고 감사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마감일이 한 달이 더 남았었고 지원자가 많아서 전화가 올 줄은 1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 전공은 사회복지였고 지원한 회사는 출판사였으니 내게 면접의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의 이력서를 보고 뽑아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내일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벌써 긴장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신감이 하락했다. 그저 글쓰기가 좋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얕은 생각으로 지원한 출판사에 대해 놀랍게도 아는 지식이 하나도 없었고 관련된 전공과 스펙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퇴사는 2월 중순에 했지만, 역류성 식도염이 4월 말에 걸려서 이곳저곳 병원에 열심히 다니며 병이 나으려고 몸부림을 치다 보니, 백수생활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이렇다 하게 이룬 것도 없이 골골대고 있었다.
면접이란, 회사에 내가 이런 능력을 가졌고 이렇게 일할 수 있으니 뽑아달라고 어필하는 시간 아닌가. 면접의 기회는 주어졌지만, 어필할 게 없었다. 슬슬 취업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취업하려는 의욕은 없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라는 의미에서 실업급여를 준 것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수동적으로 구직활동을 한 것이었다.
아무튼, 들떠있던 감정이 가라앉으니까 다시 막막함이 밀려왔다. 면접 준비를 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 현재 건강 상태를 생각했을 때도 직장생활 하기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한약보다 내과 약이 좀 효과가 있었는지, 트림 증상은 전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았지만 여전히 소화 장애를 겪고 있었다. 면접을 보러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갈수록 커졌다. 경험 삼아 편하게 마음먹고 면접을 보고 올까 생각도 했지만, 엄마는 일할 생각이 없는데 가서 면접을 보면 그분들의 시간도 뺏는 거 아니겠냐고 몸이 좀 더 회복되고 나서 취업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셨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갈팡질팡하는 상황 속에서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친구가 동네 공원에서 걷고 있다 길래,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바로 공원으로 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퇴사한 지 한 달 좀 넘은 친구도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목요일부터는 계속 비가 온다는 기상 예보와 더불어 면접은 바로 다음 날 화요일이었던지라 우리는 당장 떠나기로 했다. 이대로 취업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 되어 즉흥 여행을 단숨에 계획했다.
나는 워낙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라서 그렇게 여행 계획을 빨리 짠 적이 없었는데, 1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1박 2일 숙소와 차편을 예매했다.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도착해서 부랴부랴 짐을 싸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을 고려하지 못하고 차편을 빡빡하게 예매하는 바람에, 사람들 틈에 끼어서 지옥철을 타고 가야 했지만, 퇴사 후 첫 여행이었던지라 설레는 마음에 피곤함도 이길 수 있었다. 아침 아홉 시쯤 면접 담당자에게 개인 사정으로 면접을 보러 갈 수 없다고, 죄송하다고 문자를 남겼는데 지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친절한 답장도 받아서 마음 놓고 더욱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도망치듯이 친구와 즉흥으로 떠난 여행은 참 좋았다. 에메랄드빛의 강릉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었다. 무계획으로 갔던지라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추억거리가 되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물결, 시원한 바다 냄새, 바다를 가득 느꼈던 1박 2일이었다.
성수기가 아니어서 사람도 많지 않고 딱 좋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이 아닌 다른 장소라는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여행 중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집에서 느끼는 나른함과 또 다른 여유였다. 백수의 일상도 반복되면 무료해지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꼭 처음 가본 사람처럼 여행 가면 항상 하게 되는 생각 중 하나다) 친구랑 함께 가서 더 좋았다. 언젠가 혼자서 여행도 가보고 싶지만 아직은 함께 하는 여행이 더 재밌고 즐겁다. 역류성 식도염의 회복은 잠시 내려놓고 먹고 싶은 음식도 꽤 먹었다. 조금 나아졌던 병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잘 다녀왔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벗어나 작은 일탈은 내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왜 진즉 떠나지 못했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왜 이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집순이로 보낸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그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망설이다가 두려움이 앞서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퇴사하고 이제야 떠난 여행에서 자유로움을 마음껏 느꼈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선택의 갈림길에 서더라도, 나는 면접이 아닌 여행을 택했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동안 여행이 너무 가고 싶었으니 말이다.
평소 남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데,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가는 속도에 맞출 필요 없다. 그들과 비교할 것은 더더욱 없다.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에 떠밀려서 혹은 사람들의 소리에 휩쓸려서 취업하게 됐다면 얼마 못 가서 그만뒀을 것이다. 주위에서 뭐라 하든 상관없이, 가끔은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온전히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때론 터무니없을지라도, 때론 무모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