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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릭 Nov 23. 2020

왕따가 남긴 흉터

나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며(2)

왕따 사건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왼쪽 눈 주변에 대상포진이 생겼다. 초등학교 1학년의 나는 아빠 손을 붙잡고 병원에 다녔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대상포진이 눈에 생기면 실명이 될 위험도 있다고 했다. 초기에 발견하고 병원에 간 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학교는 열흘 정도 빠졌다. 왼쪽 눈 주변에 발생한 대상포진은 순식간에 이마를 지나 두피까지 퍼졌다. 처음에는 물집이 나타났고 병원에 다니며 치료받는 과정에서 딱지가 생겼다. 딱지로 인해 한쪽 얼굴은 보랏빛으로 뒤덮였다.


그때 나는 괴물 같이 변해버린 내 얼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 아프고 두려웠지만 어린 내 손을 꼭 잡고 병원에 함께 가는 아빠가 곁에 있어서 든든했다. 하마터면 왼쪽 눈이 실명될 뻔했는데, 다행히 병원을 다니면서 대상포진은 가라앉았고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부풀었던 왼쪽 눈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두피까지 뒤덮였던 대상포진도 딱지가 떨어지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흉터는 깊게 남아서 회복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대상포진의 흔적으로 지금도 왼쪽 눈썹 아래에 작은 흉터가 남아있다.


또 다른 흉터는 오른쪽 무릎에 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생겼다. 학교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나름 멋을 부리겠다고 치마처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갔었다. 산뜻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경주에 도착한 첫날, 평소 덜렁대는 탓에 웃프게도 내 바지에 내 발이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에 피가 철철 흐를 만큼 크게 다쳤는데 그때 무릎에 생긴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둘 다 내 몸에 남은 흉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나의 실수로 넘어져서 생긴 흉터와, 일대다수로 나를 공격했던 고의적인 왕따로 인해 생긴 흉터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내 왼쪽 눈에 남은 흉터가 찌릿찌릿하고 아플 때가 있다. (이건 뭐, 영화 <해리포터> 해리 이마에 생긴 흉터도 아니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대상포진은 수두 바이러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질환으로 어릴 적에 몸속에 오랜 기간 숨어있던 수두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다시 활성화되어 이 병을 일으킨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두 살 때 수두도 앓았다고 하셨다. 체질적으로 몸이 약한 것도 있겠지만 '왕따'라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니까 어린 나는 면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상포진의 고통은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한다. 나는 아직 출산의 경험이 없기에 그 고통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고작 여덟 살의 내가 당시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재발률은 매우 낮다고 하니 안심이긴 하다.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곳이 종종 따끔거리면서 아플 때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아픈 건가 하고 나를 살피려고 한다.


그때 겪은 대상포진의 고통보다 영혼의 고통은 훨씬 더 크게 받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들이라고 믿었던 모두에게 버려졌다고 느낀 그 감정은, 그 고통은 대상포진보다 더욱 큰 상처를 남겼다.  누군가에게 또 버려질까 봐 불안하고 무서웠다.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왜 내가 왕따를 당했는지 분하고 억울했다.


나를 따돌림했던 애들에게 제대로 사과를 받았는지, 내가 용서를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이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인지라 잊어버린 것 같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때의 괴로운 기억까지 세세하게 떠올리며 다 떠안고 사려면 아마 수명이 금방 단축될 듯싶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서 더욱 희미해지기를 기다려본다. ‘ 날의 괴로움은  날로 족하다(마태복음 6 34)'고 하니 말이다.


그때의 그 아이가 나한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누군가 왕따를 당해서 아프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었다. 왕따를 당한 건 피해자인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자괴감에 빠지지 말라고, 그 잘못을 자꾸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말라고.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거울 속에 내 얼굴을 천천히 살펴봤다. 한때는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왼쪽 눈에 남겨진 작은 흉터가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 나중이 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지우지 않고 내버려 두려고 한다. 이젠 이 흉터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고통의 시간을 잘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어 대견하기도 하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왼쪽 눈의 흉터가 종종 따끔거리는 것처럼, 그보다 더 깊게 파인 마음의 흉터는 자주 따끔거린다. 아직은 어렵게 느껴지는 인간관계도 시간이 더 흐르고 내가 더 단단한 사람이 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흉터가 남을지라도, 그것마저도 보듬어가고 싶다.





다음 편에 계속.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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