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릭 Nov 24. 2020

또 전학 가요?

나의 트라우마를 마주하며(3)

대상포진으로 남은 흉터는 조금씩 회복해갔지만, 마음의 상처는 깊게 남아서 늘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학교생활에 온전하게 적응하기도 전에, 집은 이사를 갔고 나는 또다시 전학을 가야 했다. 왕따 사건 후로 2년 후인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안타깝게 이번에도 학기 중간에 가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몰라도 학기 중간에 전학을 가는 건, 이미 형성된 관계 속에 내가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걸 의미했다.


전학을 갔던 첫날, 낯선 환경, 낯선 친구들을 맞닥뜨릴 생각에 심장이 쿵쾅대고 겁이 났다.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새로운 학교에서 나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낯가림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처음 본 옆 짝꿍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생존본능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사귀어나갔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1학년 때처럼 내 필통을 탐내서 바꾸자는 아이는 다행히 없었다. 교환일기를 주고받는 단짝 친구도 생겼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불안은 늘 함께했다. 단짝 친구가 나보다 다른 친구랑 더 친해 보이면 질투가 나고 내 친구를 뺏길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 사이에서 미묘한 일로 소외감을 느낄 때면,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꾹 참아내며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다. 내 속마음을 말해서 그 친구들의 심경을 건드렸다가, 혼자가 되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렇게 철저히 나를 누르고 친구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은 학교를 갔다 와서 엄마한테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왕따를 당한 지 2년밖에 안 지났으니 불안정한 상태에서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나의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엄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기도해주셨다.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어서 당연하게 교회를 다녔지만, 그 순간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10살의 나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예수님,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들어와 주세요.”라고 진심으로 기도했었다.


불안해서 어찌할 수 없고 힘들었던 마음이 기도하면서 조금 편안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도 잔잔해졌다. 때때로 불안은 불쑥불쑥 올라왔지만 매일 학교를 다니고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놀고, 다투기도 하고, 혼자 짝사랑하는 남자애도 생기면서 즐겁고 소중한 일상이 더욱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진정 마음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담임선생님도 만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뛰어놀며 추억도 차곡차곡 쌓아갔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3년 동안 짝사랑했던 남자애한테 용기 내서 고백했다가 차이기도 하고, 단짝 친구와 같은 중학교에 가고 싶어서 1 지망부터 3 지망까지 가고 싶은 중학교를 똑같이 맞췄는데, 다른 학교로 갈라지는 슬픔도 있었다. 친구는 남녀공학으로, 나는 여중으로 배정을 받으며 중학교에 진학했다.


여자들만 있는 세계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었다. 여자들만 있어서 편하기도 했지만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아져서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관심이 없는 얘기에 공감이 안 가도 억지로 웃은 적이 많았고, 몰라도 어느 정도 아는 척하며 반응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쌓이다 보니, 하루는 집에 와서 가면 좀 그만 쓰고 싶다며 엉엉 운 적도 있었다. 주위의 시선과 반응을 과하게 의식하며 눈치를 살피다 보니 솔직하게 내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원할 것 같은 반응을 해주며 열심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을 벗은 게 나인지, 쓴 게 나인지, 도대체 어떤 모습이 나인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괜히 트라우마가 아닌가 보다. 언뜻 봤을 때 괜찮아진 것 같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지고 자주 힘들었다. 그렇게 좋은 일도, 힘든 일도 겪으면서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는 세 번째 전학을 가야 했다. ‘중2병’이라고 불리는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는 여름에,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왕따가 남긴 흉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