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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릭 Dec 03. 2020

내 인생이 종친 줄 알았던 수능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 지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그날은 바로 2018학년도 수능 전날이었다. 불가피하게 수능은 일주일 뒤로 긴급 연기되었다. 시험 바로 전날이면 불안한 마음에 공부도 손에 안 잡히는 날인데, 갑자기 일주일이 연기되었다니. 당시 수험생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누군가는 ‘땅이 준 기회’라고 했지만, 나였다면 그 일주일이 굉장히 고역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지진보다 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2020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11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코로나 19의 여파로 인해 12월 3일로 수능이 연기된 것이다. 물수능도 불수능도 아닌 코로나 수능, 바로 오늘이었다. 교문에서부터 응원하며 초콜릿과 핫팩을 건넸던 후배들과 선생님들은 없고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마스크를 쓰고 온도 체크와 손 소독을 거친 뒤에야 수능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니, 오늘 하루 수능을 치르느라 고생했을 수험생들을 생각하며 애잔한 마음이 밀려왔다.



1.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나는 13학번으로 2012년도에 수능을 치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SKY 입학을 배출하는 유명한 고등학교로 가고 싶었는데 그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기에, 그나마 동네에서 내신점수 커트라인이 제일 높았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학벌에 대한 욕망이 어마 무시했기 때문에 늘 내가 가고 싶은 대학교의 목표는 높게 두고 있었지만,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던 건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부터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첫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어두컴컴한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로 갈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비아저씨보다 먼저 복도 불을 켰고 자물쇠로 잠겨있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보다 첫 번째로 도착해서 뿌듯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범생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주변 친구들은 얘기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믿었다. 지금 보는 모의고사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며 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꽤 늦은 감이 있었지만, 3학년이 되어서 수시를 위한 논술도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데 논술 시험을 쳤던 대학에서 모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수시에서 올킬을 당한 나는 정시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수시에 붙은 애들을 제외하고 나처럼 정시를 봐야 하는 친구들도, 오히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줄을 놓고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갈수록 야자(야간 자율학습) 시간은 개판이었다. 우리 반만 그런가 싶어서 봤더니 다른 반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나도 집중이 안 되겠다 싶어서 담임선생님께 야자시간에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공부해도 될지 여쭤봤다. 지각이나 조퇴 등 학교 규칙에 엄격했던 담임선생님이셨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여쭤봤는데 평소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쉽게 허락해주셨다. 석식을 먹고 야자시간이 되면, 혼자 학교를 나와 도서관 열람실로 가서 마음을 굳게 다 잡고 공부했다.




2. D-DAY, 수능

당장 눈에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면 보상을 받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드디어 D-DAY. 대학수학능력시험 있는 아침이었다. 초중고 12년, 학창 시절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긴장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생리 예정일에 생리가 시작을 안 해서 불안 불안했었는데, 하필이면 수능을 보는 아침에 터진 것이었다. 세상에나. 정신이 아찔했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도 모자랄 판에 생리 첫째 날에 수능을 봐야 한다니. 게다가 첫째 날은 생리통도 심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생리통 약을 먹고 배에 핫팩을 붙이고 비장한 마음으로 수능 시험장에 도착했다.


막상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을 덜 했는데, 갈수록 아랫배의 통증은 심해졌고 너무 힘들었다. 약을 먹어도 첫째 날은 생리통이 심했기 때문에 오롯이 그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정말 무슨 정신으로 시험을 치렀는지 그때의 기억은 흐릿하다.



3. 시험이 끝난 후, 느낀 절망

하지만 시험이 끝났을 때 느낀 절망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벼랑 끝에 간신히 서 있었는데,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수능을 치렀는데 끝도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내 인생이 종친 날이었다. 집에 도착한 내게, 다행히 부모님은 시험이 어땠는지 묻지 않으셨다. 내 표정에서 이미 수능 결과가 드러났는지, 수고했다는 말이 전부였다. 아빠는 치킨을 시켜 먹을지 물어보셨지만, 나는 평소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도 마다하고 생각 없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채점을 했는데, 역시나. 결과는 참혹했다.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평소보다 등급이 훅 떨어졌다.


다음날, 학교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눈물만 줄줄 나왔다. 억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친구들도 하염없이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말을 걸지 못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너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주변에서 얘기해줬던 말들이, 그렇게 철썩 같이 믿었던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어도 성공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첫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열심히 하면 분명 빛을 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수험생 모두의 마음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 자는 ‘열심히’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순식간에 모래 알갱이로 흩어져버렸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며 엄청난 패배감에 빠졌다. 재수는 지금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미 내가 쏟을 수 있는 노력을 다 부었다고 생각했기에 더 공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지 못했던 가정환경 탓도 해봤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내 탓이었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수능이 끝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수험생이 많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죽을 용기도 없었다. 대학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도 없었다. 당시에 길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4. 성적에 맞춰서 겨우 간 대학교

결국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그나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전공이었기에 사회복지학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애써 고른 학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후에도 패배감과 열등감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들에게 내가 다니는 대학교를 말해야 하는 순간마다 부끄러웠고,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뭘 해도 의욕이 나지 않았고, 뭘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수업시간에 앉아있어도 수업을 듣지 않았고, 시험기간에도 공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하기 위해 첫 차를 타고 집을 나섰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공부를 해야 하는 목적이 없었다. 늘 만족이 없었고 자괴감과 자기 연민에 빠져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5. 그리고 지금

사실 지금도 이름 있는 대학교를 나왔다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학벌에 대한 욕망이 쉽게 놓아지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단순히 학벌을 위해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4년을 공부한 걸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은 이름 있는 대학교를 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에 가도 끊임없는 비교는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환경을 가야 내가 업그레이드되는 게 아니라 나의 상태가 달라져야 내가 살고 있는 인생도 달라지는 문제였다.


학교는 중간에 3학년을 마치고 1년 휴학을 해서 2018년 2월에 졸업했다. 이제는 누군가 내가 나온 대학을 묻는다면,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덤덤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정도는 아니지만 부끄럽진 않다. 지금 나도 내세울 건 없지만, 내 모습이 부끄럽지는 않다. 내가 다닌 학교가 문제였다기보다 내 생각과 마음이 문제였던 것 같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손가락질했던 마음, 나를 갉아먹는 생각들. 그렇게 낭비했던 그 시간들은 돌이킬 수 없다.


물론 이름 있는 대학교를 나온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그 이름표가 떼어진 나를 마주할 때, 나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빈껍데기가 아닐까. 화려한 이름표가 없을지라도, 야무지게 속이 알찬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느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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